얼굴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노랫말처럼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이 아니다. 벽에 걸린 액자 속 얼굴을 바라보다가 문득 고선사의 말씀이 떠오른다. “태어나기 전 80년의 얼굴이요, 죽은 뒤 80년의 얼굴이로다.” 얼이 담긴 굴, 그래서 얼굴이다. 얼굴은 한 인간의 시간과 삶이 스민 자리다. “꽃으로도 때리지 마라.” 그 말이 향하는 곳 또한 얼굴이다. “꽃보다 아름답다”는 말 역시 생명을 품은 존재에 대한 예의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아침저녁으로 얼굴을 씻는다. 단지 위생이 아니라 스스로를 대하는 최소한의 태도다. 이제 그 얼굴들이 공적인 선택의 장에 섰다. 곧 다가올 지방자치선거, 출마한 이들의 얼굴이 세상에 걸렸다. 유권자는 묻는다. 저 얼굴이 우리의 삶을 담아낼 수 있는가. 한때 우리는 거리 위에 놓인 얼굴을 밟았다. 의견의 표현이라 했지만, 그 방식은 결국 존엄을 훼손하는 일이었다. 문제는 그것이 일회적 장면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상대의 얼굴을 지우고, 짓밟고, 낮추는 방식이 우리 사회 곳곳에서 반복되고 있다. 그러나 얼굴은 지워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 사람의 삶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얼굴에는 가족이 있고, 시간이 있고, 책임이
저 달을 향하여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화성에서 띄우는 편지> 500회. 5년의 시간이 쌓여 한 줄의 길이 되었다. 흘러간 날들이 문장이 되었고, 문장들은 어느덧 나를 이루는 시간이 되었다. 졸졸 흐르던 방학일기의 실개울은 이제 제법 물살을 이루어 모래톱을 만들고 방향을 틀 줄 아는 강이 되었다. 계절을 건너며 적은 감상, 일상과 세상에 대한 짧은 촌평, 역사와 문화, 그리고 천변을 따라 걸은 기행들. 쉰여 회의 기획글까지 더해져 나는 나도 모르게 하나의 흐름 속에 서 있다. 돌이켜보면 체계도 없고, 의도도 거창하지 않았다. 그저 발길 닿는 대로, 눈길 머무는 대로 적어왔을 뿐이다. 그러나 그 무심한 기록들이 어느새 500이라는 시간의 무게를 만들었다. 나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시인으로서도, 기행 작가로서도, 또 시나리오를 쓰는 사람으로서도 깊이 발효된 한 맛을 이루었다 말하긴 이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있다. 나는 멈추지 않았고, 앞으로도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글의 마루턱에 서서 묻는다. 지금까지의 글이 ‘올라온 길’이라면, 앞으로의 글은 어떤 ‘내려갈 길’이 될 것인가. 어느 원로의 말처럼 평생은 공부이고, 한 편의 시처럼 심장
왜, 왜, 왜 – 홀릭큐브53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쉼 없이 이어온 홀릭큐브 이야기를 이제 매듭지으려 한다. 수십 회에 걸친 질문과 사유의 여정은 결국 하나의 물음으로 모인다. 우리는 왜 묻는가. 안동 동남쪽, 고요한 산자락 아래 자리한 정정(鼎井)재를 다녀왔다. 퇴계의 스승, 역동 우탁 선생의 숨결이 깃든 그곳. 화성에서 천 리 길을 건너 도착한 뜨락에는, 말보다 깊은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바람은 눈 녹은 흙내음을 실어 나르고, 손끝에 닿는 흙의 감촉은 묵직하게 살아 있었다. 그 자리에서 문득 깨닫는다. 배움이란 멀리서 얻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 안에서 움트고 있었다는 사실을. 아이는 묻는다. “이게 뭐야?” 철인은 묻는다. “삶이란 무엇인가?” 질문의 깊이는 다르나, 그 뿌리는 하나다. ‘왜’라는 물음. 이는 지식 이전의 본능이며, 존재를 밀어 올리는 생명의 힘이다. 우리는 묻기에 살아 있고, 묻기에 나아간다. 그러나 삶은 늘 순탄치 않다. 신체와 환경, 경제의 무게는 저마다의 꽃을 더디게 피운다. 그럼에도 내면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작은 ‘왜’ 하나가 다시 우리를 일으켜 세운다. 돌이켜보면, 인류의 모든 진보 또한 그러했다. 불을 다루고, 하늘을 읽
홀릭큐브놀이를 기반한 전 연령(생애) 교육프로그램 모델 제안-홀릭큐브53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만병통치약, 어릴적 재래장터에서 꽹과리와 장구를 두드리며 외치던 약장수 모습이 생각나다. 국민가수, 국민배우, 가정상비 품처럼, 전국민 교육놀이도구에 대한 상상이다. 교육은 지식을 전달하는 것을 넘어, 스스로 생각하고 연결하며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가는 과정이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홀릭큐브 놀이는 전 연령을 아우르는 새로운 교육 도구로 주목할 만하다. 작은 핀과 홀을 연결하고 해체하며 다시 구성하는 단순한 활동이지만, 그 안에는 사고의 확장 구조가 자연스럽게 담겨 있다. 유아 단계에서는 보고 만지고 연결하는 감각 중심 활동을 통해 기초 인지 능력을 키운다. 초등 단계에서는 다양한 구조를 만들며 개념과 원리를 이해하고, 협력 속에서 문제 해결력을 기른다. 중학생은 기존 구조를 해체하고 새롭게 설계하는 과정을 통해 융합적 사고를 경험하며, 고등학생은 보이지 않는 개념을 구조로 표현하는 추상적 사고 능력을 발전시킨다. 대학 단계에 이르면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이론을 만들고 실제 문제에 적용하는 수준으로 확장된다. 홀릭큐브 교육의 핵심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 있다.
홀릭큐브놀이에 기반한 육서의 이해-홀릭큐브52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문자는 단순한 기호가 아니라, 인간의 생각과 세계를 담아내는 그릇이다. 한자의 형성과 원리를 설명하는 육서(六書)—상형·지사·회의·형성·전주·가차—는 문자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확장되어 왔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 개념은 낯설고 추상적이어서, 처음 접하는 이들에게는 쉽지 않은 장벽이 되곤 한다. ‘홀릭큐브놀이’는 육서를 보다 생생하게 이해하게 하는 또 하나의 길을 열어준다. 홀릭큐브는 조합과 변형, 그리고 관계 속에서 의미를 드러내는 구조를 지닌다. 이는 육서의 원리와 닮아 있다. 예를 들어, 상형은 사물의 모양을 본떠 만든 글자다. 큐브의 한 면이 특정한 형태를 이루는 순간, 우리는 그것을 하나의 이미지로 인식한다. 단순한 배열이 의미를 갖는 순간이다. 지사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개념을 점과 선으로 표현하는데, 큐브의 방향과 위치 변화 또한 보이지 않는 질서를 드러낸다. 회의는 여러 요소가 결합해 새로운 뜻을 만들어내는 방식이다. 큐브의 색과 면이 서로 어우러져 하나의 패턴을 이루듯, 서로 다른 의미가 만나 더 큰 뜻을 만들어낸다. 형성은 소리와 뜻이 결합된 구조인데, 이는 큐브의 규칙과 패
홀릭큐브놀이에 기반한 유교사상의 이해-홀릭큐브51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유교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다듬고, 삶의 질서를 세워가는 사상의 뿌리다. 인(仁)과 예(禮), 의(義)와 지(智)는 단순한 덕목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구현되어야 할 삶의 방식이다. 그러나 이 오래된 가르침은 때로는 교훈으로만 남아, 몸으로 체득되기에는 거리가 있어 보이기도 한다. ‘홀릭큐브놀이’는 유교사상을 보다 살아 있는 감각으로 이해하게 하는 하나의 길이 된다. 홀릭큐브는 질서와 관계를 손으로 풀어내는 도구다. 흩어진 면을 맞추기 위해서는 전체를 보고, 부분을 조율해야 한다. 이는 유교가 말하는 조화와 닮아 있다. 한 면만을 맞추려다 보면 다른 면이 흐트러지듯, 인간관계 또한 한쪽만을 앞세우면 균형을 잃는다. 부모와 자식, 스승과 제자, 친구 사이의 관계가 서로를 살피며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점에서, 큐브의 구조는 곧 유교적 세계관의 축소판이라 할 만하다. 아이들이 큐브를 돌리며 시행착오를 겪는 과정은 곧 수양의 과정이다. 처음에는 어긋나고 막히지만, 반복과 성찰 속에서 점차 길을 찾는다. 이는 유교에서 강조하는 ‘수신(修身)’의 모습과 겹친다. 스스로를 닦고, 그 바탕 위
홀릭큐브 놀이에 기반한 새로운 정치모델 연구-홀릭큐브50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정치는 오랫동안 권력의 획득과 유지, 그리고 제도 운영의 문제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갈등과 분열이 심화되는 오늘의 현실에서 정치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요구된다. 홀릭큐브 놀이는 이러한 전환의 단서를 제공한다. 단순한 조립과 해체의 반복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관계, 연결, 재구성이라는 정치의 본질적 요소가 담겨 있다. 홀릭큐브에서 하나의 조각은 독립적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다른 조각과의 연결 속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이는 개인이나 집단이 서로의 관계 속에서 정치적 역할을 형성한다는 점과 닮아 있다. 기존 정치가 고정된 진영과 구조에 머물렀다면, 홀릭큐브적 정치모델은 유동적이고 개방적인 연결을 전제로 한다. 상황과 의제에 따라 다양한 연합이 형성되고 해체되는 구조다. 또한 이 놀이는 완성된 형태에 집착하지 않는다. 구조는 언제든 해체되고 다시 구성될 수 있다. 이는 정책과 제도 역시 절대적 정답이 아니라, 시대와 조건에 따라 계속 수정되어야 함을 시사한다. 중요한 것은 결과의 고정이 아니라 과정의 유연성이다. 홀릭큐브 정치모델은 경쟁 중심에서 협력 중심으로의 전환을 지향한다.
홀릭큐브놀이 기반으로 명리학 이해-홀릭큐브49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명리학은 인간의 삶을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읽어내는 지혜의 체계다. 태어난 연·월·일·시를 바탕으로 오행의 균형과 흐름을 살피며, 개인의 기질과 가능성을 해석한다. 그러나 이 깊은 학문은 때로는 어렵고 추상적으로 느껴지기 쉽다. ‘홀릭큐브놀이’는 명리학을 보다 직관적으로 이해하게 만드는 흥미로운 도구가 된다. 홀릭큐브는 ‘구조를 손으로 만지며 이해하는 사고의 틀’이다. 큐브의 면과 축, 색과 배열은 단순한 놀이를 넘어 관계와 변화를 드러낸다. 이는 곧 명리학의 오행—목·화·토·금·수—이 서로 생하고 극하는 원리와 닮아 있다. 큐브의 한 면이 변하면 전체 구조가 영향을 받듯, 인간의 삶 또한 한 요소의 변화가 전체 흐름에 파장을 일으킨다. 아이들이 큐브를 돌리며 패턴을 찾듯, 우리는 사주의 흐름 속에서 반복과 변화를 읽는다. 처음에는 어지러워 보이던 배열이 규칙을 만나 질서를 이루듯, 삶 또한 무질서 속에서 방향을 찾아간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정답’이 아니라 ‘이해의 과정’이다. 왜 이렇게 배치되는가, 무엇이 변화를 이끄는가를 묻는 순간, 명리학은 운명을 점치는 도구가 아니라 삶을 성찰
놀이에 기반한 양자역학 이해-홀릭큐브48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양자역학은 현대 과학의 핵심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난해한 공식과 개념으로만 남아 있다. 그러나 그 본질은 의외로 단순하다. 세계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가능성과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이다. 홀릭큐브 놀이는 이 양자적 세계를 직관적으로 체험하게 한다. 큐브를 조립하는 과정에서 하나의 부품은 여러 방식으로 결합될 수 있다. 이는 하나의 입자가 여러 상태로 존재하는 중첩과 닮아 있다. 또한 한 부분을 바꾸면 전체 구조가 함께 변하는데, 이는 얽힘의 개념과 연결된다. 특정 형태를 선택하는 순간 구조가 확정되는 경험은 관측에 의해 상태가 결정되는 양자적 특징을 떠올리게 한다. 이 놀이는 정해진 답을 찾기보다 가능성을 탐색하게 한다. 어떤 구조가 나올지는 과정 속에서 결정되며, 결과는 하나가 아니라 여러 경로의 선택이다. 이는 확률과 관계로 움직이는 양자 세계의 사고방식과 맞닿아 있다. 물론 홀릭큐브가 물리 법칙 자체를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복잡한 수식 이전에 ‘구조적 이해’를 돕는 데는 충분하다. 손으로 만지고 조합하는 경험 속에서, 보이지 않는 세계의 원리가 조금 더 가까워진다.
홀릭큐브 놀이에 기반한 불교사상 이해-홀릭큐브47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놀이를 통한 종교사상의 이해 두번째로, 불교사상과의 상관성을 전개한다. 우리는 흔히 불교를 사찰이나 경전 속에서만 만난다. 그러나 불교의 핵심은 삶의 구조를 이해하는 데 있다. 홀릭큐브 놀이는 이 점에서 불교사상을 손으로 체험하게 하는 도구가 된다. 작은 핀과 홀을 연결해 구조를 만들고, 다시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과정은 불교의 연기(緣起)를 그대로 드러낸다. 어떤 것도 홀로 존재하지 않고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는 사실이 놀이 속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또한 완성된 형태는 잠시일 뿐, 곧 다시 해체된다. 이는 모든 것이 변한다는 무상(無常)을 보여준다. 특정 구조에 집착하면 새로운 구성이 막히는데, 이때 우리는 공(空)의 개념을 체감한다. 비워야 새로 만들어진다. 홀릭큐브 놀이는 정답을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두며 균형을 찾게 한다는 점에서 중도(中道)의 사고를 훈련시킨다. 아이들은 놀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관계를 이해하고, 어른들은 고정된 사고에서 벗어나는 경험을 한다. 결국 이 놀이는 단순한 조립이 아니라 ‘존재를 이해하는 과정’이다. ‘일체유심조’, ‘모든 게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