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컥과 울컥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벌컥’은 문을 힘껏 열어젖힐 때, 물을 단숨에 들이킬 때 쓰이는 말입니다. ‘울컥’은 가슴속 깊은 감정이 차올라 목울대를 넘어서는 순간을 수식합니다. 청소년국제폰영화제가 어느덧 제4회를 맞습니다. 돌이켜보면, 무식이 용기를 낳았다 할까요. 선후배, 지인, 문화예술·교육 관계자분들을 끊임없이 귀찮게 하고 설득하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누구나 손에 쥔 생활도구 ‘폰’을 매개로 청소년들의 호기심을 깨우고, 자기 존재와 정체성을 확인하며, 나아가 진로에 작은 이정표를 세워주고 싶다는 마음 하나였습니다. 그 첫걸음은, 아마도 문을 거칠게 열어젖히듯 ‘벌컥’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입니다. 올해도 8월 31일, 접수가 마감되었습니다. 한 달여의 분주한 일정이 지나갔지요. 해마다 10여 편씩 늘어나는 출품작, 그리고 높아져가는 작품 수준. 심사위원들의 전언만으로도 벌써 마음이 설렙니다. 주변 사물을 향한 눈길, 오감을 깨우는 호기심. “이게 뭐지?”, “한번 해볼까?”라는 물음에서 피어난 첫 생각이 글과 말로 싹을 틔우고, 행동으로 이어져 스스로의 창작품으로 태어났습니다. 그 설렘과 기쁨이야말로 내일을 열어가는 진짜 에너지입니다. 9월
해우소 놀이마당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호새: 요즘 뭐 신나는 일이 없을까요? 코로나-19 때문에 거리엔 셔터 내리고, 입마저 닫아야 하니 마음을 어디에 풀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돈키: 원래 민초들의 삶은 고달픈 법이지. 내 배가 불러야 나랏님이 누군지 관심을 두지 않는데, 요즘은 가을낙엽처럼 거리에 나뒹구는 꼴이 참 안쓰럽네. 옛날엔 놀이마당이 열려 두드리고 어울리며 힘든 세상을 견뎠지. 호새: 그럼 오늘 양주별산대 놀이마당에 가볼까요? 돈키: 휴관이라도 가보면 복잡한 생각이 좀 정리될 것 같아. 호새: 가면무도회나 카니발 축제 같은 건가요? 돈키: 글쎄다. 두드리고 지껄이고, 몸짓으로 세상을 한바탕 흔드는 거지. 가설극장 포장을 들추 듯, 윗동네 위선을 풍자와 해학으로 후려치며 놀이패와 관중이 어우러지는 자리야. 요즘은 댓글 달고 패러디하면서 풀지만, 옛날엔 탈을 쓰고 상전 흉보다 해묵은 감정을 털어 내지. 민초들의 해우소였던 거야. 호새: 놀이마당이 열리면 웃음보가 터지겠네요. 돈키: 프랑스 니스, 이탈리아 베네치아, 브라질 카니발도 그렇듯 시대 따라 놀이마당 모양새는 달라졌어. 풍요를 기원하거나 권력에 저항하기도 했고, 오늘날엔 개인의 자유와 개성을 표
전곡리 선사유적지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호새: 비 오는데 어디 가요? 돈키: 비 오니 가는 거다. 한탄강 유역 전곡리 선사유적지와 주변을 둘러볼 거야. 호새: 거기까지는 멀잖아요? 돈키: 현생 인류가 케냐의 여인으로부터 시작됐다지. 아득한 세월을 건너 거기까지 왔는데, 그게 뭐가 멀어. 호새: 선사유적지가 여기저기 있는데 굳이 한탄강까지 가요? 돈키: 그곳에서 미군 병사 그렉 보웬이 ‘아슐리안형 주먹도끼’를 발견했어. 그 덕분에 고고학계의 기존 ‘<모비우스 학설>이 뒤집혔지. 전곡리 선사유적지가 그때부터 세상에 알려졌단다. 호새: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요? 돈키: 그럼. 전기 구석기문화의 실존이 밝혀지면서 한반도 인류사가 수십만년으로 깊어졌어. 우리 역사 자긍심을 크게 높인 사건이지. 반만년 역사도 그 뿌리를 증명한 셈이고. 게다가 전국 곳곳 구석기 유적은 내몽골까지 이어지는 문화권과도 닿아 있어. ‘동북공정’으로 왜곡되는 만주 일대 고대사를 바로잡는 데 귀중한 사료가 되지. 호새: 저쪽에 구석기인들이 토끼몰이처럼 코끼리랑 코뿔소를 사냥하네요. 이곳에도 살았나 봐요? 돈키: 글쎄, 사료를 더 살펴봐야겠지. 코로나 때문에 박물관 관람이 쉽지 않으니 오
600리 철가시울 돈키: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궁노루 산울림… 호새: 뭘 읊조리세요? 돈키: 응, 비목이란 노래야. 부를 때마다 한 생각이 들어 가슴이 아릿해. 태극기가 저리 펄럭이는 게 바람 때문만은 아니야. 저곳에 산화한 수많은 청춘, 그들을 가슴에 묻은 가족의 한 맺힌 눈물이 흐르거든. 휴전협상 중에도 한 치 땅이라도 더 찾으려 치열했지. 피의 능선이나 백마고지 전투는 격전의 아픔을 생생히 전하고 있어. 호새: 저기가 DMZ군요. 돈키: 그래,155마일 한반도를 가로지른 허리벨트지. 노산 이은상 시인은 저 피어린 600리를 순례하며 가슴 저민 분단의 아픔과, 피워야 할 나라사랑을 노래했어. 호새: 한 서린 곳이네요. 돈키: 그래. 8·18 판문점 도끼 만행이나 남침 땅굴, GP 총격 같은 휴전 협정 위반 사건들이 요즘까지 꽤 있었지. 언젠가는 풀어야 할 과제야. 호새: 앞으로 어찌 될까요? 돈키: 글쎄, 누가 알겠니. 최근 남북 합의로 일부 GP를 철거하고 도로를 연결했다네. 지도자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지. 한때 주목받던 소떼 방북도 전설이 되었고, 이산가족 상봉·개성공단·금강산 관광도 빛바랜 일이네. ‘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바람이
격몽요결(擊蒙要訣)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돈키: 사각사각, 가을 오는 소리가 들리네. 오늘은 율곡 선생이 제자들과 노닐던 화석정(花石亭)을 들러볼까 한다네. 호새: 아, 오천원권 지폐 속에 정자관 쓰신 그 선비 아저씨 말이지요? 돈키: 그래. 그분의 발자취가 크고 깊으니 살펴볼 만하지 않겠나. 화폐에 새겨진 이들은 저마다 불굴의 기상과 큰 뜻을 남긴 분들이야. 세종대왕, 신사임당, 퇴계, 율곡, 충무공 모두 그러하지. 호새: 그냥 멀리서 마음에만 두고 가지 않으면 안 될까요? 돈키: 어허, 뜻이 일면 몸도 움직여야 일이 빛나지. 가보자꾸나. — 휘릭 호새: 저기 화석정 현판이 보이네요. 전망이 확 트여 강과 산이 어우러진, 노을 질 무렵은 참으로 장관이겠어요. 돈키: 오길 잘했지 않나? 저 강물처럼 율곡 선생의 사상과 정신도 세월을 흘러 길이 이어지리라. 호새: 그런데 요즘 같은 디지털 시대에, 성리학을 자꾸 되새길 까닭이 있나요? 돈키: 돈이 지배하는 세상이라 성리학이 낡아 보일 수도 있지. 그러나 조선 오백 년을 이끈 통치 이념이었네. 지도자의 품성과 자세에 따라 나라의 품격이 달라지는 법,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례가 이를 증명하지. 호새: 그 성리학이란
세상을 바꾸는 힘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호새: 어디로 가시나요? 길을 알아야 발걸음도 덜 무겁지요. 돈키: 네 길, 내 길, 세상에 얼굴 내밀며 출판단지로 가는 거다. 호새: 머리만 굴려 글 쓰면 되는 건 아니겠지요? 돈키: 사람들, 다들 길을 잃은 듯 허둥대고 있지. 이분법에 매이지 않고, 내면의 울림을 글에 담아야 해. 글이 곧 세상을 바꾸는 힘이라 하지 않니. 호새: 저기 ‘쉬어가면 어떠리’ 카페에서 잠시 숨 좀 고르자구요. 돈키: 책은 좀 읽니? 양서를 읽어야 해. 공부는 남을 위해 하는 거다. 호새: 내 살기도 벅찬데 무슨 글이랍니까. 돈키: 아니야. 읽고 또 읽어야 한다. 감각이 깨어나면 마음도 깊어지지.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다”고 했거늘, 세상사에 눈 감고 살 순 없지 않겠니? 호새: 한 세상뿐인데 꼭 그러해야 합니까? 돈키: 두 세상도 아닌 단 한 세상이니 더욱 그래야지. 제대로 된 임자를 만나면 세상도 흔들 수 있어. 네가 나를 만나 고생이 많구나. 호새: 주인님, 괜한 말씀 마시고 울렁울렁한 이야기나 풀어봐요. 돈키: ‘성냥팔이 소녀’ 아느냐? 성냥 세 개피로 세상 사람들 가슴을 젖게 했거든. 그것이 글이 가진 힘이
마음대로 달려 봐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호새: 돈키님, 도로명이 ‘자유로’라니, 마음대로 달리라는 뜻인가요. 돈키: 글쎄, 허나 속도 제한이 있지 않겠니? 이 길은 자유를 상징하는 길이야. 호새: 그런데 왜 하필 ‘자유로’라고 부르죠? 돈키: ‘자유’라는 말 속에는 큰 세상이 담겨 있단다. 힘없는 민족들이 피 흘리며 얻어낸 소중한 가치지.《빠삐용이나《안네의 일기를 읽으면 가슴이 먹먹해지잖아. 봄날 풀밭 위에 나비가 팔랑이고, 파란 하늘에 구름이 두둥실 떠가는 모습. 그것이 제 모습일 때 빛이 나는 거야. 그런 자유를 빼앗는다면, 세상은 숨이 막혀 메말라 버리지 않겠니? 호새: 그럼, 안네는 마치 상자속에 나비 같네요. 돈키: 그래. ‘자유’라는 말, 알아듣기 쉽지 않아, 행동으로 지키기는 더욱 어렵고. 초등학교 시절 방학이 되면 일과표를 벽에 붙여 놓곤 했어. 공부시간, 자유시간… 그리 나누었지만 결국 온종일 뛰놀았지. 그러니 생명체가 제때 제모습을 피워내는 게 자유가 아닐까 해. 호새: 듣고 보니, 프랑스 사람들은 그런 자유를 위해 왕의 목까지 날렸다고 하더군요. 돈키: 그랬지.아메리카에서도 패트릭 헨리가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외치며 식민지의 멍에
행주치마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호새: 달포 전에 약속된 일정이라, 비가 와도 가는군요? 돈키: 그래, 젠틀맨 은회장, 작은 거인 송회장, 그리고 나. 오래 사귄 건 아니지만 이래저래 어울리다 보니 대화가 물 흐르듯 흘러. 호새: 은회장님, 본관이 행주라면서요? 은회장: 맞아요. 돈키: 행주 하면 뭐가 제일 먼저 떠오르시오? 은회장: 글쎄… 행주산성, 행주치마, 행주대첩, 행주대교 정도지. 송회장: 고양시 행주라… 그 넷이 다인가요? 돈키: 아니지. 행주가 낳은 은회장도 있잖소. (웃음) 호새: 초행길이라 설레네요. 한 시간쯤 걸리겠죠? (휘리릭) 돈키: 봐라, 이 성은 4국시대 축성 기법이 남아 있단다. 한성 가까이 위치해서 옛날부터 전략적 요충지였지. 호새: 임진왜란의 3대 대첩, 바로 행주대첩(幸州大捷)이 벌어진 곳이군요? 돈키: 그렇지. 권율 장군의 지략, 관군 화포의 위력, 치마부대 아낙네들의 돌멩이 지원이 어우러져 왜군의 기세를 꺾었지. 저 높게 솟은 대첩비를 보아라, 승전의 표상이 따로 없구나. 호새: 저기, 빗방울에 젖은 행주대교 위로 자동차들이 물방개처럼 달리네요. 돈키: 그래. 저 사람들, 내 땅의 힘을 돋우기 위해 제 일터로 가는 게지. 다
수원천 송가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호새: 드디어 광교산 정상에 올랐네요. 참, 바람이 상쾌해요. 돈키: 그러게, 사방이 탁 트여 시원하구나. 이곳은 용인시와 의왕시, 수원시가 맞닿는 경계에 명산이지. 호새: 잠시 쉬어 가는 김에, 이곳까지 이르며 떠오른 시상을 한번 들려주시면 어떨까요? 돈키: 음, 10여년전 이곳을 출발해 수원천 줄기가 황구지천에 흘러들어 한몸을 이뤄 평택호에 이르는 물길을 따라 걸었어. 그때 눈길에 담아둔 감정이야. <수원천 송가> 아득한 옛적, 하늘이 열렸더라. 큰 땅에서 바다에 이르도다. 한울림 흘러내려 백두대간이라 하고 그 한 줄기 자락에 솟은 묏 방울을 할배 할매들은 광교산이라 부르네. 넉넉한 품, 가르침의 품이런가. 어미의 새벽 정성이 하늘에 닿아 산정수리, 시루봉에 한 방울 굴러내려 풀꽃이 피어나고, 두 방울 이어 흐르니 새들도 노래하네. 가슴 설레는 이백리 물길여정 형제봉 아침 햇살 고운 단장에 물오리는 선남녀 눈길을 어루는데 나그네 발길은 물길 따라 흐르누나. 오호라, 문밖이 무릉도원, 화홍이려 아이들 웃음소리 물보라로 피어나고, 팔달청람에 산들바람이 불어오니 새색시 꽃가마 나불대는 버들이로세. 두물머리 물길, 잠
화성대문을 열다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호새: 팔달문은 화성의 남문이라 들었습니다. 동란의 참화에도 그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네요. 돈키: 그래. 옛사람들은 “남문은 남아 있고, 북문은 부서지고, 서문은 서 있고, 동문은 도망갔다” 하며 우스갯소리가 전해오지. 그 말 속에 세월의 격랑을 견뎌낸 문들의 운명이 깃들어 있어.. 호새: 오늘은 창룡문 아래에서 윤규섭 선생의 해설을 들었다지요? 돈키: 그래. 화성의 역사와 사연을 품은 말씀에 귀 기울이다 보니 정오를 넘겼다네. 지동시장에서 순대국밥 한 그릇에 반주를 곁들이니, 가벼운 취기에 마음마저 느슨해져 흘러가는 강물 같더구나. 호새: 시장통 정조대왕 좌상 앞 ‘불취무귀(不醉無歸)’라는 글귀가 더욱 깊게 다가왔겠아요. 돈키: 그래, “취하지 않으면 돌아가지 말라.” 축성의 고단함을 위로한 임금의 말씀이지. 그 속에는 백성을 편안케 하지 못한 자책 또한 스며 있네. 왕의 무거운 심회를 술 한 잔 속에 녹여낸 것이야. 호새: 서장대 북소리를 상상하니 옛 군례의 장면이 눈앞에 어른거립니다. 돈키: 둥둥, 북소리에 가슴이 뛰네.나도 문 안으로 들어서며, 시공을 거슬러 이백 년 전 정조시대에 발을 딛는 듯해. 호새: 팔달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