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요유(逍遙遊)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호새: 오늘은 또 어디로 가시려구요? 돈키: 동두천이야. 이름만 들어도 뭔가 낯설지? 백두산의 백두는 아니고, 산자락에 기대 선 동네지. 떠오르는 게 뭔가? 소요산 단풍, 미군부대… 그리고 휴전선 냄새가 좀 비릿하게 밴 곳이야. 호새: 오, 묘하게 긴장감이 느껴지는 곳이네요. 돈키: 그렇지. 근데 오늘은 심각한 일이 아니라 전·시장·군수협의회 모임이야. 동두천시청에서 열린다 해서 아침 일찍 길을 나섰지. 차로는 두 시간, 전철로는 쉰 정거장 넘으니 세 시간이야. 호새: 아이고, 긴시간 동안 뭘 하시려구요? 돈키: 독서삼매경이지 뭐. 과학책 하나 꺼내 읽어야지, 아인슈타인이 그러더군. “자연의 가장 아름다운 선물은 이해하려 애쓰는 그 과정에서 생겨나는 기쁨이다.” 말이 근사하지 않냐? 호새: 와~ 그러니까 호기심이 많을수록 인생이 재미난 거네요. 돈키: 딱 그거다. 느려도 좋으니, 알쏭달쏭한 거 파고들다 보면 세상 보는 눈이 트이는 거지. 호새: 시청사가 참 단정하네요. 돈키: 시청사가 사치스럽진 않으면서도 기품은 있고, 자료를 살피니 축제며 각종 시설과 아트거리. 힐링코스를 알차게 꾸려놨어.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물테마촌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호새: 저 강 두 줄기가 만나네요. 여기가 두물머리죠? 돈키: 그래. 북한강과 남한강이 한 몸이 되는 곳이지. 이름도 그래서 양수리라 불려. 만남은 늘 큰 에너지를 만든단다. 음과 양이 만나 생명을 잉태하고, 남과 북이 만나면 통일을 이루듯이. 호새: 물줄기가 합쳐지는 모습이 꼭 새로운 세상을 여는 것 같아요. 돈키: 나도 예전에 둘째 형님이 이곳에 계셔 자주 오곤 했지. 장마 끝 물살은 거셌고, 물안개는 피어올라 장엄했어. 금강산에서 흘러온 북한강과 검룡소에서 발원한 남한강이 굽이굽이 돌아와 만나는 풍경은 대자연의 극치라 할 만하지. 호새: 수도권 가까이에 이런 한적하고 신비로운 곳이 있다니 놀라워요. 돈키: 맞아. 아침저녁으로 물빛이 달라지고, 안개가 피어나며, 일몰이 붉게 물들면 모든 근심이 녹아내리는 듯하지. 겸재 정선도 이 풍광을 ‘독백탄’에 담아 남겼을 만큼 사랑받아 온 곳이야. 호새: 그래서 사람들이 가족, 연인, 친구와 와서 추억을 쌓는군요. 돈키: 그렇지. 저기 느티나무는 소원을 들어준다 하니, 덤으로 복도 받는 셈이지. 나는 언젠가 이곳에 오래 머물며 물길을 바라보고 싶단다. 호새: 방금 말씀을 들으니 노자의
징검다리 로맨스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호새: 오늘은 어디로 가요? 돈키: 서종면 오복집. 여기서 스무 리 남짓, 여유로운 길이야. 왼쪽으론 강변 풍경이 이어지고, 오른쪽으론 초목들이 눈길을 어루만져 주지. 호새: 길마저 운치가 있네요. 돈키: 서종대교 지나고 경춘고속도로, 노문삼거리를 건너면 도착이야. 가다 보면 ‘소나기 마을’ 표지판이 눈에 들어오지. 호새: 황순원 선생님 『소나기』… 소년과 윤초시네 증손녀의 이야기, 그 마을이군요? 돈키: 그래. 어린 시절의 아련한 추억이 동네 어귀 우물가처럼 마음에 서성이곤 하지. 단테는 “지구를 움직이는 힘은 사랑”이라 했지만, 나는 우주를 움직이는 것도 결국 사랑이라고 생각해. 호새: 그러고 보니 요즘 노랫말도 사랑 이야기가 대부분이네요. 돈키: 맞아. 누구나 가슴에 묻어둔 그 순정이 삶을 지탱하는 힘이지. 동창회만 가도 러브스토리로 웃음꽃이 피잖아. 누가 누구를 좋아했네, 창문 너머로 바라봤네… 그런 이야기에 다들 다시 소년, 소녀가 되는 거야. 호새: 듣기만 해도 미소가 번지네요. 돈키: 세월이 흘러 자식을 낳고 어른이 되었어도 그 시절의 순정은 여전히 살아 있지. 징검다리, 섶다리, 뒷동산… 잃어버린 줄 알았던
별주부전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호새: 지난주엔 그 어려운 성리학 공부했잖아요. 오늘은 머리 식힐 겸 멋진 데 가면 어때요? 하늘은 높고, 호새가 살찌는 가을이 왔거든요! 돈키: 그래, 네 말 들으니 생각난다. 혹시 ‘별주부전’ 아니? 용왕님 약 고치려고 토끼 간 구하러 자라가 뭍에 올라와 토끼랑 수다 떨던 이야기. 토끼가 간 줄 수 없다며 버텨서 째지는 그 기분을 ‘재즈’로 풀려고 자라섬에서 페스티벌을 연다니, 가보자고! 호새: 자라 간이든 토끼 간이든 각자 달린 대로 사는 건데 뭘 거길 간다요? 근데 주인님은 재즈가 뭔지는 아시기는 해요? 돈키: 재즈? 알면 뭐 하냐, 그냥 몸이 먼저 흔들리면 그게 재즈지! 호새: 또 저번처럼 목 뒤로 젖혀 “마이웨이”나 한 곡 뽑으실거요? 돈키: 허허, 말 잘한다. 가을엔 떠나는 거야. 달빛에 들바람 불고, 강물은 물향기 실어 나르고, 솔숲에서 잣향기 은근히 풍기고… 운치가 장난 아니야. 게다가 코로나 스트레스도 훅 날려버릴 거라니까! _휘릭!_ 돈키: 근데 자라라는 놈이 원래 성실하고 지혜롭거든. 요즘 같은 세상엔 딱 맞는 캐릭터야. 자라만큼은 해야지. 넌 홍당무나 봐야 눈이 휘둥그레하지, 충직함은 글쎄~ 호새: 에이,
벌컥과 울컥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벌컥’은 문을 힘껏 열어젖힐 때, 물을 단숨에 들이킬 때 쓰이는 말입니다. ‘울컥’은 가슴속 깊은 감정이 차올라 목울대를 넘어서는 순간을 수식합니다. 청소년국제폰영화제가 어느덧 제4회를 맞습니다. 돌이켜보면, 무식이 용기를 낳았다 할까요. 선후배, 지인, 문화예술·교육 관계자분들을 끊임없이 귀찮게 하고 설득하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누구나 손에 쥔 생활도구 ‘폰’을 매개로 청소년들의 호기심을 깨우고, 자기 존재와 정체성을 확인하며, 나아가 진로에 작은 이정표를 세워주고 싶다는 마음 하나였습니다. 그 첫걸음은, 아마도 문을 거칠게 열어젖히듯 ‘벌컥’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입니다. 올해도 8월 31일, 접수가 마감되었습니다. 한 달여의 분주한 일정이 지나갔지요. 해마다 10여 편씩 늘어나는 출품작, 그리고 높아져가는 작품 수준. 심사위원들의 전언만으로도 벌써 마음이 설렙니다. 주변 사물을 향한 눈길, 오감을 깨우는 호기심. “이게 뭐지?”, “한번 해볼까?”라는 물음에서 피어난 첫 생각이 글과 말로 싹을 틔우고, 행동으로 이어져 스스로의 창작품으로 태어났습니다. 그 설렘과 기쁨이야말로 내일을 열어가는 진짜 에너지입니다. 9월
해우소 놀이마당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호새: 요즘 뭐 신나는 일이 없을까요? 코로나-19 때문에 거리엔 셔터 내리고, 입마저 닫아야 하니 마음을 어디에 풀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돈키: 원래 민초들의 삶은 고달픈 법이지. 내 배가 불러야 나랏님이 누군지 관심을 두지 않는데, 요즘은 가을낙엽처럼 거리에 나뒹구는 꼴이 참 안쓰럽네. 옛날엔 놀이마당이 열려 두드리고 어울리며 힘든 세상을 견뎠지. 호새: 그럼 오늘 양주별산대 놀이마당에 가볼까요? 돈키: 휴관이라도 가보면 복잡한 생각이 좀 정리될 것 같아. 호새: 가면무도회나 카니발 축제 같은 건가요? 돈키: 글쎄다. 두드리고 지껄이고, 몸짓으로 세상을 한바탕 흔드는 거지. 가설극장 포장을 들추 듯, 윗동네 위선을 풍자와 해학으로 후려치며 놀이패와 관중이 어우러지는 자리야. 요즘은 댓글 달고 패러디하면서 풀지만, 옛날엔 탈을 쓰고 상전 흉보다 해묵은 감정을 털어 내지. 민초들의 해우소였던 거야. 호새: 놀이마당이 열리면 웃음보가 터지겠네요. 돈키: 프랑스 니스, 이탈리아 베네치아, 브라질 카니발도 그렇듯 시대 따라 놀이마당 모양새는 달라졌어. 풍요를 기원하거나 권력에 저항하기도 했고, 오늘날엔 개인의 자유와 개성을 표
전곡리 선사유적지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호새: 비 오는데 어디 가요? 돈키: 비 오니 가는 거다. 한탄강 유역 전곡리 선사유적지와 주변을 둘러볼 거야. 호새: 거기까지는 멀잖아요? 돈키: 현생 인류가 케냐의 여인으로부터 시작됐다지. 아득한 세월을 건너 거기까지 왔는데, 그게 뭐가 멀어. 호새: 선사유적지가 여기저기 있는데 굳이 한탄강까지 가요? 돈키: 그곳에서 미군 병사 그렉 보웬이 ‘아슐리안형 주먹도끼’를 발견했어. 그 덕분에 고고학계의 기존 ‘<모비우스 학설>이 뒤집혔지. 전곡리 선사유적지가 그때부터 세상에 알려졌단다. 호새: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요? 돈키: 그럼. 전기 구석기문화의 실존이 밝혀지면서 한반도 인류사가 수십만년으로 깊어졌어. 우리 역사 자긍심을 크게 높인 사건이지. 반만년 역사도 그 뿌리를 증명한 셈이고. 게다가 전국 곳곳 구석기 유적은 내몽골까지 이어지는 문화권과도 닿아 있어. ‘동북공정’으로 왜곡되는 만주 일대 고대사를 바로잡는 데 귀중한 사료가 되지. 호새: 저쪽에 구석기인들이 토끼몰이처럼 코끼리랑 코뿔소를 사냥하네요. 이곳에도 살았나 봐요? 돈키: 글쎄, 사료를 더 살펴봐야겠지. 코로나 때문에 박물관 관람이 쉽지 않으니 오
600리 철가시울 돈키: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궁노루 산울림… 호새: 뭘 읊조리세요? 돈키: 응, 비목이란 노래야. 부를 때마다 한 생각이 들어 가슴이 아릿해. 태극기가 저리 펄럭이는 게 바람 때문만은 아니야. 저곳에 산화한 수많은 청춘, 그들을 가슴에 묻은 가족의 한 맺힌 눈물이 흐르거든. 휴전협상 중에도 한 치 땅이라도 더 찾으려 치열했지. 피의 능선이나 백마고지 전투는 격전의 아픔을 생생히 전하고 있어. 호새: 저기가 DMZ군요. 돈키: 그래,155마일 한반도를 가로지른 허리벨트지. 노산 이은상 시인은 저 피어린 600리를 순례하며 가슴 저민 분단의 아픔과, 피워야 할 나라사랑을 노래했어. 호새: 한 서린 곳이네요. 돈키: 그래. 8·18 판문점 도끼 만행이나 남침 땅굴, GP 총격 같은 휴전 협정 위반 사건들이 요즘까지 꽤 있었지. 언젠가는 풀어야 할 과제야. 호새: 앞으로 어찌 될까요? 돈키: 글쎄, 누가 알겠니. 최근 남북 합의로 일부 GP를 철거하고 도로를 연결했다네. 지도자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지. 한때 주목받던 소떼 방북도 전설이 되었고, 이산가족 상봉·개성공단·금강산 관광도 빛바랜 일이네. ‘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바람이
격몽요결(擊蒙要訣)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돈키: 사각사각, 가을 오는 소리가 들리네. 오늘은 율곡 선생이 제자들과 노닐던 화석정(花石亭)을 들러볼까 한다네. 호새: 아, 오천원권 지폐 속에 정자관 쓰신 그 선비 아저씨 말이지요? 돈키: 그래. 그분의 발자취가 크고 깊으니 살펴볼 만하지 않겠나. 화폐에 새겨진 이들은 저마다 불굴의 기상과 큰 뜻을 남긴 분들이야. 세종대왕, 신사임당, 퇴계, 율곡, 충무공 모두 그러하지. 호새: 그냥 멀리서 마음에만 두고 가지 않으면 안 될까요? 돈키: 어허, 뜻이 일면 몸도 움직여야 일이 빛나지. 가보자꾸나. — 휘릭 호새: 저기 화석정 현판이 보이네요. 전망이 확 트여 강과 산이 어우러진, 노을 질 무렵은 참으로 장관이겠어요. 돈키: 오길 잘했지 않나? 저 강물처럼 율곡 선생의 사상과 정신도 세월을 흘러 길이 이어지리라. 호새: 그런데 요즘 같은 디지털 시대에, 성리학을 자꾸 되새길 까닭이 있나요? 돈키: 돈이 지배하는 세상이라 성리학이 낡아 보일 수도 있지. 그러나 조선 오백 년을 이끈 통치 이념이었네. 지도자의 품성과 자세에 따라 나라의 품격이 달라지는 법,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례가 이를 증명하지. 호새: 그 성리학이란
세상을 바꾸는 힘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호새: 어디로 가시나요? 길을 알아야 발걸음도 덜 무겁지요. 돈키: 네 길, 내 길, 세상에 얼굴 내밀며 출판단지로 가는 거다. 호새: 머리만 굴려 글 쓰면 되는 건 아니겠지요? 돈키: 사람들, 다들 길을 잃은 듯 허둥대고 있지. 이분법에 매이지 않고, 내면의 울림을 글에 담아야 해. 글이 곧 세상을 바꾸는 힘이라 하지 않니. 호새: 저기 ‘쉬어가면 어떠리’ 카페에서 잠시 숨 좀 고르자구요. 돈키: 책은 좀 읽니? 양서를 읽어야 해. 공부는 남을 위해 하는 거다. 호새: 내 살기도 벅찬데 무슨 글이랍니까. 돈키: 아니야. 읽고 또 읽어야 한다. 감각이 깨어나면 마음도 깊어지지.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다”고 했거늘, 세상사에 눈 감고 살 순 없지 않겠니? 호새: 한 세상뿐인데 꼭 그러해야 합니까? 돈키: 두 세상도 아닌 단 한 세상이니 더욱 그래야지. 제대로 된 임자를 만나면 세상도 흔들 수 있어. 네가 나를 만나 고생이 많구나. 호새: 주인님, 괜한 말씀 마시고 울렁울렁한 이야기나 풀어봐요. 돈키: ‘성냥팔이 소녀’ 아느냐? 성냥 세 개피로 세상 사람들 가슴을 젖게 했거든. 그것이 글이 가진 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