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출발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신방구리: 이곳 부산역에서 출발한 거예요? 돈키: 무궁화호를 타고 내려왔지. 역 광장에 누워 밤하늘의 별을 올려다보다가, 새벽 두 시쯤 비방울이 떨어지더라. 그 순간 바로 출발했어. 숙박업소에 들러 잠시 눈을 붙일까도 했는데, 마음을 다잡고 인도 따라 밤길을 걸었지. 지금이 아침 여섯 시 사십 분이니까 아마 저녁 일곱 시쯤에 병점에 닿을 수 있을 거야. 신방구리: 시가지를 벗어나면 더 어두웠을 텐데요. 모두 잠든 시간에 혼자 걷는 기분은 어땠어요? 돈키: 담담했지. 열흘 일정으로 떠난 길이거든. 새벽 두 시의 어둠 속에서는 앞만 보고 걷게 되더라. 그러다 보니 걸음이 자연스레 빨라졌고, 마음이 앞서가 구포에 먼저 닿았지. 군대에서 배운 독도법 덕에 지도를 틈틈이 확인하며 길을 놓치지 않았어. 배움이라는 게, 꼭 필요할 때 제 역할을 하더라구. 첫날이라 그런지 발걸음도 가벼웠고. 신방구리: “기억 앞에 겸손해야 한다”는 말도 있던데요. 그런데… 이 길이 맞긴 맞아요? 돈키: 맞아. 그땐 터널을 지나 구포까지 가는 동안 열 번은 물어봤을 거야. 지금은 내비게이션을 따라가니 길 찾기가 참 편하지. 그래도 여행은 사람들에게 묻고,
부산-화성간 기행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14-5년 전의 일이다. <화성소나타>와 <한반도횡단소나타>를 탄생시키는 데 큰 힘이 된 여정, 부산에서 병점까지 한여름에 감행한 울트라 워킹(2011.8)이었다. 도상거리로 400여 킬로미터, 어림잡아 천 리가 넘는 길이다. 국도를 따라 걷다 보니 주변의 역사 유적지에는 발길이 닿지 않는다. 눈길을 주기보다는, 오히려 스스로를 극한으로 몰아붙이는 시간이다. 자기 담금질이라 해야 할까. 끝내 몸과 마음의 최저점에 이르렀을 때, 순결한 그 무엇, 정제된 맑디맑은 약수가 솟아나는 듯했다. 깊은 산중 옹달샘에 어린 물처럼. 그 덕분일까? 어려움에 맞닥뜨릴 때마다, 나는 종종 그때를 떠올린다. “왜 걸어요?” 주변의 물음이다. “나는 왜 걷지?” 내면에서 이는 자문이다. 그때는 그저 “걷는다”고 답했는지도 모르겠다. “왜 사냐고 묻거든 그냥 웃지요”라는 말처럼, 들은 바를 어릿하게 버무려 넘겼다. 걸으며 메모해 두었던 수첩을 잃어버린 탓에, 다시 정리해야겠단 마음만 품은 채 여러 해를 미뤄두었다. 걷기가 취미가 되어 이곳저곳을 걷다 보니, 누적 거리가 어느새 1,000킬로미터를 훌쩍 넘겼다. 국토기행 &l
또 다른 여정을 기약하며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돈키: 그려지지 않은 시간을 뭐라 부를 수 있을까? 호새: 저는… 생명이나 희망 같은 말이 떠오르네요. 돈키: 그래, 나도 그래. 결국 사람은 자기 길을 가야 해. 산을 넘고 물을 건너며 몸으로 겪어보니 알겠드만. 호새: 그래서 이 여정이 값졌네요. 돈키: 정제되지 않은 생각과 행동은 세상을 어지럽히지. 온전한 ‘나’를 이뤄야 비로소 깨닫고, 그래야 타인도 사랑할 수 있다는 걸 이번 도보여정에서 배웠어. 호새: 길 위에서 선인들의 발자취도 많이 떠올랐겠어요?. 돈키: 실천하지 않는 깨달음은 그저 지식일 뿐이라는 말, 그 경구가 참 마음을 울리더군. 호새: 7박 8일인데 참 많은 길을 걸었네요. 돈키: 경부고속도로에서 시작해 팔당대교, 두물머리, 자연휴양림… 횡성, 봉평, 평창을 지나 영동고속도로, 대관령을 넘어 마침내 강릉, 동해까지. 겉으론 이동이었지만, 속으론 내면이 풍요로워진 여행이었지. 호새: 세상엔 아무도 없고, 나 혼자 가득 찬 느낌이었어요. 돈키: 그래. 스며든 생각들은 고이고이 간직할 참이다. 상상의 즐거움, 오감의 자유, 비움의 쾌감. 도보 이동은 나를 찾고, 나를 만들어가는 내 삶의 결을 다듬는
세상의 품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해안도시―강릉] 강릉시청 앞 호새: 드디어 바다네요. 저기 보이는 게 동해죠? 돈키: 그래. 강릉이다. 서해에서 출발해 동해까지, 700리. 말로는 짧아 보여도, 두 발로 걸으면 인생 한 토막이지. 호새: 8일이나 걸렸잖아요. 힘들지 않으셨어요? 돈키: 힘들었지. 그래서 더 대견하다. 오감이 깨어 있고, 시간의 결이 손에 잡힌다. 방전된 에너지를 충전하듯, 나는 내 길을 걸었을 뿐이야. 호새: 도시는 번잡한데, 마음은 오히려 조용해 보여요. 돈키: 강릉이 그런 곳이야. 잠시라도 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군. 깨어 있는 삶, 겸손한 마음… 몸이 먼저 배워버렸어. 호새: 도착하니까 꽃다발이랑 현수막까지… 조용한 여정 아니었어요? 돈키: 하하. 조용히 떠났는데, 성대하게 끝났지. 아무 탈 없이 걸었으니, 두 손 모을 일이지. [힐링호수 ― 경포대] 차 안, 주문진으로 가는 길 호새: 여기가 경포대예요? 호수가 거울 같아요. 돈키: 그래. 청명해서 아름다운 게 아니라, 깊어서 마음을 끌어당기는 호수지. 호새: 빛에 비친 물결이 은비늘 같아요. 돈키: 지나온 시간들이 저기 담겨 있지. 사유의 둘레길이야. 어릴 적, 교실 유리창 닦고
동서를 연결하다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호새: 저 고갯마루 위에 우뚝 선 비석 보이세요? 돈키: 영동고속도로 개통 기념비지. 백두대간의 기상처럼 서 있구나. 길 하나가 세상을 이렇게 바꾼다는 증거야. 호새: 수도권이랑 강원도가 확 가까워졌죠. 돈키: 그래. 길은 단순히 이어주는 게 아니야. 길이 열리면 삶이 움직이고, 줄기가 뻗으면 가지가 생기지. 호새: 예전엔 강원도 하면 ‘…이래요’ 방언에 옥수수, 감자부터 떠올랐는데요. 돈키: 이젠 관광, 레저, 힐링의 땅이지. 고랭지 채소는 식탁으로 오고 바다는 도시의 숨통이 됐어. 호새: 지인들 중에도 강원도에 농가나 세컨하우스 가진 분들 많아요. 돈키: 청춘 때는 막걸리 잔 들고 노래했지.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 봐도…” 자, 떠나자 동해바다로! 삼등 완행열차 타고 말이야. 호새: 고래사냥이요? 하하. 돈키: 그래. 그때는 다들 홍길동이었고 강원도는 율도국이었지. 호새: 그 청년들이 지금은요? 돈키: 중년 고개를 넘어 쉼터를 찾아 다시 강원도로 가지. 봄엔 꽃, 여름엔 바다, 가을엔 단풍, 겨울엔 눈. 사계절이 놀이터가 됐어. 호새: 강릉 단오제도 세계무형문화유산이잖아요. 돈키: 지구촌의 축제가 되었지. 평창
한강의 발원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호새: 선배님 집에서 마시는 물이 다 여기서 온다는 거죠? 오대산… 이름만으로도 기운이 납니다. 돈키: 그래. 정상 비로봉이 1,563미터지. 백두대간 줄기라 등산객들도 많이 올라오고. 두물머리에서 본 그 남한강 물줄기, 저기서 출발해 거기까지 얼마나 걸렸을까… 생각하면 참 묘해져. 호새: 오늘은 오히려 ‘시간을 잊자’고 나온 건데, 또 시간을 세고 계시네요? 돈키: 사람 마음이란 게 그렇지. 잊으려 하면 더 또렷해진다. 자, 산자락 오르막이 시작이다. 저기 봐라. 소나무, 잣나무, 떡갈나무… 이름도 모를 풀꽃들이 눈길을 끄네. 손길이 덜 닿은 숲이라 그런지, 제멋대로인데도 조화롭지 않냐? 호새: 해발 800미터 산책길… 고요하네요. 어?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요. 돈키: 인적도, 차량도 없으니 더 고요하지. 오래간만에 고독이 온몸을 감싸는 느낌이다. 이럴 때 내 안의 ‘내’ 모습을 드러내. “왜 이 길을 걷고 있나?” 하고 묻거든. 호새: 다시 이 길을 걸 기회가 있을까… 그런 마음이죠? 돈키: 그렇지. 저기 자작나무를 봐. 매미가 허물 벗어놓은 듯 흰 몸통을 드러내고 줄지어 서 있구나. 풍욕이라도 하는 모양이지. 호
미지의 세계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호새: 아직 새벽 다섯 신데 벌써 나서요? 돈키: 오늘은 대관령까지 20킬로야. 열 시에 고개에서 일행 만나려면 서둘러야지. 종자연구소 지나서 대관령 휴게소, 신재생에너지 전시관까지 들러야 하거든. 오늘이 마지막 일정이니 더더욱. 호새: 마지막… 그러고 보니 여행 끝이 보이네요. 돈키: 그래. 한동안 게으름에 빼앗긴 시간을 오늘에서야 되찾는 느낌이야. 이 아침고요엔 참 이상한 힘이 있어. 머릿속 잡념이 서늘하게 가라앉고, 오직 나만 또렷해지는 순간. 호새: 길이 점점 깊어지네요. 간판 보세요, ‘오대산 콘도’, ‘오대산 산장’… 돈키: 오대산 자락이란 증거지. 산이라는 건 가까울수록 이름이 더 많이 나타나는 법이야. 저기, 당나귀 목장도 보인다? ‘돈키호테 목장’이라니 웃기지 않나? 내 별명이 돈키호텐데 말이야. 호새: 왜 돈키호테예요? 풍차에 돌진하는 그 사람? 돈키: 열정이란 게 때론 엉뚱함과 붙어 다니는 법이거든. 한여름 뙤약볕에 도보 장정을 하고 있는 나를 보면… 뭐, DNA 속에 그런 기질이 있는지도 모르지. <종자연구소 앞에서> 호새: 여기가 종자연구소군요. 고랭지연구소 지나니까 금세네요. 돈키: (앉으
메밀꽃-한우마을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돈키: 둔내에서 진부로 가려면 봉평 쪽으로 돌아가는 길이 있긴 한데, 이번엔 6번 국도를 택했어. 그냥 상상으로만 들르고 가는 거지. 호새: 바로 안 가고요? 돈키: 돌아오는 길에 들르려고. 봉평이라는 이름만 봐도 마음이 먼저 움직여. 호새: 거기 이효석 작가의「메밀꽃 필 무렵」 배경이잖아요? 돈키: 그래. 허생원이랑 동이가 나오고, 물레방아 소리랑 시골 장터 냄새가 살아 있는 이야기지. 호새: 상상만 해도 분위기가 좋아요. 돈키: 여름에는 특히 메밀국수랑 메밀전병이 최고야. 더위에 달아오른 속을 부드럽게 눌러주지. 호새: 메밀 막걸리까지 곁들이면요? 돈키: 흐드러진 메밀꽃밭을 걷다가 한 사발 들이키면… 그게 바로 봉평 여행이야. 호새: 요즘은 사계절 내내 꽃을 볼 수 있잖아요. 돈키: 그렇다해도, 별빛 아래 물레방아 도는 풍경은 옛 이야기가 더 잘 어울려. LED 불빛 대신 초롱초롱한 별빛 말이야. 호새: 물소리, 산새소리 들으면서요. 돈키: 그리고 하얀 메밀꽃밭에 벌렁 눕는 거지. 그게 진짜 러브스토리야. 호새: 봉평에는 오일장도 서죠? 돈키: 그래, 재래장은 그냥 장이 아니라 이야기가 모이는 마당이야. 먹거리, 풍물
힐링 나들이 – 고양시 방문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한 해의 숨결이 가장 낮아지는 끝달, 나는 한수 이북의 땅, 고양(高陽)으로 길을 열었다. 새벽 일곱 시, 집을 나서 1호선 병점역에서 전철에 몸을 싣고, 종로3가에서 다시 3호선으로 환승하여 백석역에 내렸다. 발걸음은 옛 시장·군수협의회 정례모임이 열린 고양특례시 별관, 하늘과 가까운 스무 번째 층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거대한 건물은 뜻밖에도 조용했다. 텅 빈 공간, 숨결마저 멈춘 듯한 정적. 1층에서 노인역량강화 일자리 프로그램이 진행돼 한 분 두 분 모여드는 등 굽은 어깨들 속에서 비로소, 건물 안에 온기가 차츰 돌았다. 스무 번째 층 회의장. 남녘을 바라보니 큰 유리창 밖에 한강이 흘렀다. 수천 년 세월을 감싸 안은 물빛이 아침 햇살을 받아 유유히 몸을 풀었다. 살아오며 헐떡이던 내 숨결도 그 강물 결 따라 잠시, 고요 속으로 가라앉았다. 회의 전, 잠시 들은 이야기. 불연과 절연의 경계를 개척하며 친환경과 에너지 절감을 짊어진 한 기업인의 설명. 그 말들 사이로 이름 없는 산업전사들의 땀이 보였다. 작은 애국자의 고백처럼 가슴 한쪽이 묵직해졌다. 기획정책관의 시정 보고가 이어질 때,
청산은 국력이다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돈키: “새벽이 아직 어둡구나. 4시 40분… 오늘은 진부면사무소까지 40.7킬로다.” 호새: “태기산으로 안 가고 청태산 자연휴양림 쪽으로 길을 택하신 거네요?” 돈키: “그래. 산은 높이로 오르는 게 아니라, 숨결로 걷는 거니까. 백두대간으로 이어진 이 강원도의 준령들… 물도 여기서 태어나고, 강도 여기서 비롯되지.” 호새: “도시에선 쉼터로만 보이지만, 여긴 근원이네요.” 돈키: “나무가 땔감이던 시절, 일제와 전쟁을 지나며 산은 거의 벌거숭이가 됐지. 그래도 봄만 오면 우리는 나무를 심었어. 초등학교 운동장, 마을 둑방, 집 울타리 옆…” 호새: “식목일 말이죠?” 돈키: “그래, 지금은 육림의 날이라 부르지만… 내 마음엔 여전히 식목일이 살아 있다. 오산시 소재 독산에 친구들과 심었던 잣나무가 이제는 하늘을 가리고 있어. 사람 발길도 늘었지. 나무가 나라를 다시 키운 셈이야.” 호새: “식목일이 다시 공휴일이 되면 좋겠네요.” 돈키: “솔 냄새가 난다.” 호새: “청태산 자연휴양림 … 여길 지나네요. 그리고 저 앞은 산림청이 운영한다는 숲체원이죠?” 돈키: “그래. 여긴 진짜 청산이지.” 호새: “문득 노래가 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