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르게 하면? – 홀릭큐브38 시인 · 영화감독 우호태 의문, 반론, 탐색. 이 세 가지가 학습의 본질일 것이다. 까까머리에 학교 마크 달린 모자를 쓰던 시절, 겉은 제법 의젓해 보였지만 속에서는 몽글몽글 비판적 사고가 움트고 있었다. “왜, 왜, 왜?” 이 질문이 깊어질수록 자기 정체성에 대한 혼란이 따라온다. 기존의 질서에 비틀림이 생기고, 때로는 반항아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반항이 아니라 창의적 호기심이 싹트는 순간이다. 자기 중심을 세워가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다르게 하면?” 이 물음은 “왜 꼭 그래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기존 질서에 대한 대칭적 사고의 시작이며,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내는 출발점이다. 결국 이는 자기 생각의 방향을 정하고 선택의 갈림길에 서는 힘이 된다. 그래서 자기주도 학습과 맞춤형 학습은 단순한 교육 방식이 아니라 이 질문에서 비롯된 필연이다. 기존 질서를 따르든, 거스르든 그 모두는 ‘자기 모습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정답을 찾는 것보다 질문을 품는 것이 더 중요하다. 모범생의 의미 또한 달라져야 한다. 순종하는 태도만이 아니라, 스스로 묻고 때로는 반항하는 모습 역시 성장의 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건 어떤 규칙이 있어? – 홀릭큐브37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 아이는 비로소 ‘세상의 질서’를 알아차리기 시작한다. 수업시간과 쉬는 시간, 점심시간과 방과 후, 소풍과 방학까지— 학교라는 작은 사회 속에서 반복되는 흐름을 몸으로 익힌다. 이때부터 아이는 단순히 따르는 존재를 넘어 묻는 존재로 바뀐다. “왜 이건 다르지?” “이건 어떤 규칙이 있어?” 이 질문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다. 보이는 현상 뒤에 숨은 패턴과 구조를 찾아내려는 시도의 시작이다. 이전까지가 ‘점’에 대한 인식이었다면, 이 시기부터는 점과 점을 잇는 ‘선’을 본다. 그리고 그 선들이 만들어내는 흐름, 곧 규칙을 읽어내기 시작한다. 학습 또한 달라진다. 주어진 내용을 외우는 데서 벗어나 스스로 규칙을 찾고, 패턴을 헤아리며 자신만의 이해의 틀을 만들어간다. 이는 곧 사회를 바라보는 인식의 틀이 내면에 자리 잡았다는 뜻이다. 옛적 천자문 속에 담긴 질서와 이치, 숫자와 관계의 구조 또한 이 시기 아이들에게는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이제 앎은 단순한 축적이 아니라 방향을 가진 의지로 나아간다. 규칙과 패턴을 묻는다는 것은 관계 속에서 ‘나’의 자리를 찾는 일이다. “왜
발안천 따라서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건달산에 오른다. 지인들과 나선 휴일 산행, 가족을 동반한 등산객들이 산길에 따뜻한 온기를 더한다. 쉬엄쉬엄 한 시간 반, 해발 326미터 능선에 닿으니 화성의 두 번째 높이, 무봉산 다음으로 숨 고르는 자리다. 솔나무 향 스치고, 갈참나무 잎새 흔들리며, 진달래 붉은 기운이 산길을 먼저 맞이한다. 정상에 서니 사방이 한눈에 들어온다. 서편엔 기천저수지, 고요히 푸른 물을 품고 북쪽 멀리 태행산 너머 광교산이 흐릿한 선으로 이어진다. 동남으로는 양산봉, 가까이 삼천병마곡을 품은 태봉산, 그 기운을 이어 솟은 서봉산과 아래로 돌담저수지가 자리 잡았다. 오늘의 길은 발안천의 물길을 따라가는 여정. 이 산을 근원으로 기천저수지에서 돌담저수지로, 발안 시가지를 지나 상신뜰을 가로질러 마침내 남양호에 닿는다. 산에서 내려와 점심을 나누고 길을 잇는다. 둑방길 옆, 벚꽃나무 줄지어 선 도로를 따라 바람은 가볍고 길은 시원하다. 오른편으로 스치는 제암리의 기억, 시간을 지나 넓게 트인 남양호 입구에 이른다. 장안대교를 건너 호수를 끼고 돌아들면 왼편은 평택 고잔뜰, 오른편은 ‘남양황라’라 불리는 넉넉한 들판이 펼쳐진다. 산과 들에서 흘
어떻게 움직여?-홀릭큐브36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아이가 두 뼘 자라 또래들과 초등학교에 들어간다. 엄마 품을 벗어나 앞마당을 지나, 네모난 배움터로 향한다. 그와 함께 말도 자란다. 입말은 원리와 변화, 비교를 담으며 하나의 체계를 이루기 시작한다. 통통 튀는 질문도 달라진다. “이게 뭐야?”에서 “이게 어떻게 움직여?”로. 이 변화는 작지 않다. 정지된 ‘점’이 움직이며 ‘선’이 되듯, 아이의 인식도 움직이며 확장되기 때문이다. 움직임 속에서 아이는 변화를 본다. 변화를 보며 비교를 하고, 그 변화를 일으킨 힘—곧 원인을 묻기 시작한다. 그 순간, 사고는 원인·과정·결과를 향해 첫걸음을 뗀다. 호기심은 깊어지고 의문은 마음속에 저장된다. 그래서 교육은 그 의문이 스스로 풀릴 수 있도록 곁에서 돌보는 일이다. “무엇을 배웠니?”보다 “무엇을 궁금해했니?”가 더 본질에 가깝다. 스스로 묻고 찾아가는 배움, 자기주도적 학습은 설명을 쌓는 공부보다 오래 남는다.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 아는 배움과, 무엇을 모르는지도 모른 채 하는 배움의 차이는 결코 작지 않다. 홀릭큐브 놀이는 아이 스스로 질문하게 하는 놀이이다. 그 속에서 원리와 변화, 비교를 자연스럽게 익히며
이게 뭐야? – 홀릭큐브35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수년간 교육박람회를 다니며 보고, 듣고, 묻고, 토론했다. 그 과정에서 얻은 결론은 단순하다. 교육의 본질은 호기심이다. 호기심은 질문을 낳고, 질문은 학습의 첫 걸음이 된다. 아이가 아장아장 걷기 시작하면 세상을 향해 끊임없이 묻는다. “이게 뭐야?” 그 짧은 한마디가 인간이 처음으로 세상과 관계 맺는 방식이다. 이미 그 순간, 학습은 시작된 것이다. 돌아보면, 우리는 그 질문에 얼마나 따뜻하고 충분히 답해주었을까? 유아의 배움은 설명이 아니라 느낌에서 시작된다. 색을 보고, 소리를 듣고, 움직임을 따라 하고, 놀이 속에서 세상을 익힌다. 알록달록한 색, 딸랑거리는 소리, 손에 쥐어지는 촉감. 이 모든 것이 하나의 언어가 되어 아이의 뇌와 몸을 동시에 깨운다. 특히 촉감은 가장 먼저 열리는 감각이다. 엄마와 아기의 맞닿은 체온, 그 원초적인 교감 속에서 ‘나’라는 존재가 시작된다. 그 시작점에서 다시 울려 나온다. “이게 뭐야?” 이 질문이야말로 세상을 여는 열쇠다. 그리고 그 질문 앞에 홀릭큐브 놀이가 놓인다. 보고, 만지고, 느끼며 스스로 질문하고 답을 찾아가는 놀이.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사고의 문을
이 녀석아, 정신차려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이 녀석아, 정신차려.” 봄날이면 한 번쯤 들었을 말이다. 학창 시절, 수업에 한눈을 팔 때나 집안일을 거들다 딴청 피울 때면 어른들은 알밤 한 대 얹으며 일러주셨다. 정신일도(精神一到). 마음 하나로 모으라는 그 말, 알면서도 나른한 오후의 몸은 쉽사리 말을 듣지 않는다. 그럴 땐 찬바람 한 줄기, 혹은 냉수 한 사발이 약이었다. ‘형설지공’, ‘주경야독’.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던 말들이 실타래처럼 풀려나간 지 어느덧 반세기다. 돌아보니 인생의 고개를 여럿 넘었고, 자식들 또한 제 길 찾아 떠난 지 오래다. 엉거주춤한 세월 위로 어느새 노을이 비껴든다. 문득 묻는다.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창고에서 세상을 바꾼 이, 손끝으로 하늘의 이치를 빚어낸 이들까지. 각자의 자리에서 정신을 붙들어 세운 이들이 세상을 일으켜 왔다. 헌데 요즘 세상은. 저마다 “나요, 나요” 외치며 앞다투어 나서니 유난히도 시끌하다 정말 그들이 이 난마를 풀어낼 수 있을까? 차창 밖으로 스치는 ‘임대문의’ 글자들이 괜히 마음을 더 서늘하게 한다. 마트 진열대의 물가 앞에서 주부들의 시선 또한 점점 무거워진다. 바람이 전한다. 이제는
상처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주말 아침, 창밖 풍경이 유난히 맑다. 햇살에 부서지는 빛결 위로 ‘상처’라는 노랫말 하나가 잔물결처럼 번져온다. 그 말의 울림이, 오래된 기억의 결을 건드린다. 살아오는 동안 몸은 숱한 생채기를 견뎌왔다. 가시덩굴에 긁히고, 넘어져 무릎과 얼굴에 남았던 자국들. 그때의 아픔은 사라졌으되, 흔적은 어느새 기억으로 굳어 있다. 상처는 지워지지 않고, 다만 다른 이름으로 남는다. 선산 자락에서 유실수를 전지하던 날, 잘려나간 가지의 자리를 오래 바라보았다. 곧게 뻗은 생장을 끊어낸 자리에는 두툼한 살이 돋아나 있었다. 상처는 닫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결로 조직되고 있었다. 버려낸 만큼, 나무는 더 균형 잡힌 형상으로 서 있었다. 지난 장마에 패였던 황구지천 물길 또한 그러하다. 무너진 천변 위로 풀꽃이 다시 자라고, 바람은 그 위를 스치며 흐름을 되돌린다. 자연은 상처를 지우지 않는다. 그 위에 시간을 겹쳐 또 하나의 질서를 만든다. 몸의 상처는 세월 속에 흐릿해지지만, 마음의 상처는 쉽게 마르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마저 나를 이루는 결이 되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상처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형태를 바꾼다. 잘린 자리마다 생명은
문자의 마력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인간은 제때에 제 모습을 피워내는 존재다. 비단 인간뿐이랴. 모든 생명은 저마다의 시기에, 고유한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그러나 그 ‘제때’와 ‘제모습’에 이르는 길은 결코 순탄치 않다. 표현의 어려움은 곧 소통의 단절로 이어지고, 이는 삶의 본연한 기쁨마저 멎게 한다. 선천적 조건은 물론, 환경과 경제적 제약 또한 그 벽을 높인다. 소통은 표정과 몸짓에서 시작된다. 이어 소리가 더해지고, 문자는 이를 확장하며 인간 사유의 지평을 넓혀왔다. 글자는 단순한 기록 수단을 넘어 기호와 숫자, 그리고 사고의 구조를 담아내는 그릇이 되었다. 인류 문명 또한 동굴벽화에서 문자에 이르기까지, 소통 방식의 진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디지털과 영상 중심의 시대에 접어들며, 이토록 정교해진 문자 체계는 다시 압축과 직관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긴 문장보다 짧은 기호와 이미지가 더 빠르게 의미를 전달하는 시대, 우리는 다시 ‘본질적 표현’으로 회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훈민정음이 소리 생성의 알고리즘이었다면, 이제는 공간을 구성하는 새로운 언어가 등장하고 있다. 이른바 ‘공간언어’, ‘우주언어’로 불리는 홀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