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움직여?-홀릭큐브36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아이가 두 뼘 자라 또래들과 초등학교에 들어간다. 엄마 품을 벗어나 앞마당을 지나, 네모난 배움터로 향한다. 그와 함께 말도 자란다. 입말은 원리와 변화, 비교를 담으며 하나의 체계를 이루기 시작한다. 통통 튀는 질문도 달라진다. “이게 뭐야?”에서 “이게 어떻게 움직여?”로. 이 변화는 작지 않다. 정지된 ‘점’이 움직이며 ‘선’이 되듯, 아이의 인식도 움직이며 확장되기 때문이다. 움직임 속에서 아이는 변화를 본다. 변화를 보며 비교를 하고, 그 변화를 일으킨 힘—곧 원인을 묻기 시작한다. 그 순간, 사고는 원인·과정·결과를 향해 첫걸음을 뗀다. 호기심은 깊어지고 의문은 마음속에 저장된다. 그래서 교육은 그 의문이 스스로 풀릴 수 있도록 곁에서 돌보는 일이다. “무엇을 배웠니?”보다 “무엇을 궁금해했니?”가 더 본질에 가깝다. 스스로 묻고 찾아가는 배움, 자기주도적 학습은 설명을 쌓는 공부보다 오래 남는다.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 아는 배움과, 무엇을 모르는지도 모른 채 하는 배움의 차이는 결코 작지 않다. 홀릭큐브 놀이는 아이 스스로 질문하게 하는 놀이이다. 그 속에서 원리와 변화, 비교를 자연스럽게 익히며
이게 뭐야? – 홀릭큐브35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수년간 교육박람회를 다니며 보고, 듣고, 묻고, 토론했다. 그 과정에서 얻은 결론은 단순하다. 교육의 본질은 호기심이다. 호기심은 질문을 낳고, 질문은 학습의 첫 걸음이 된다. 아이가 아장아장 걷기 시작하면 세상을 향해 끊임없이 묻는다. “이게 뭐야?” 그 짧은 한마디가 인간이 처음으로 세상과 관계 맺는 방식이다. 이미 그 순간, 학습은 시작된 것이다. 돌아보면, 우리는 그 질문에 얼마나 따뜻하고 충분히 답해주었을까? 유아의 배움은 설명이 아니라 느낌에서 시작된다. 색을 보고, 소리를 듣고, 움직임을 따라 하고, 놀이 속에서 세상을 익힌다. 알록달록한 색, 딸랑거리는 소리, 손에 쥐어지는 촉감. 이 모든 것이 하나의 언어가 되어 아이의 뇌와 몸을 동시에 깨운다. 특히 촉감은 가장 먼저 열리는 감각이다. 엄마와 아기의 맞닿은 체온, 그 원초적인 교감 속에서 ‘나’라는 존재가 시작된다. 그 시작점에서 다시 울려 나온다. “이게 뭐야?” 이 질문이야말로 세상을 여는 열쇠다. 그리고 그 질문 앞에 홀릭큐브 놀이가 놓인다. 보고, 만지고, 느끼며 스스로 질문하고 답을 찾아가는 놀이.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사고의 문을
이 녀석아, 정신차려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이 녀석아, 정신차려.” 봄날이면 한 번쯤 들었을 말이다. 학창 시절, 수업에 한눈을 팔 때나 집안일을 거들다 딴청 피울 때면 어른들은 알밤 한 대 얹으며 일러주셨다. 정신일도(精神一到). 마음 하나로 모으라는 그 말, 알면서도 나른한 오후의 몸은 쉽사리 말을 듣지 않는다. 그럴 땐 찬바람 한 줄기, 혹은 냉수 한 사발이 약이었다. ‘형설지공’, ‘주경야독’.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던 말들이 실타래처럼 풀려나간 지 어느덧 반세기다. 돌아보니 인생의 고개를 여럿 넘었고, 자식들 또한 제 길 찾아 떠난 지 오래다. 엉거주춤한 세월 위로 어느새 노을이 비껴든다. 문득 묻는다.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창고에서 세상을 바꾼 이, 손끝으로 하늘의 이치를 빚어낸 이들까지. 각자의 자리에서 정신을 붙들어 세운 이들이 세상을 일으켜 왔다. 헌데 요즘 세상은. 저마다 “나요, 나요” 외치며 앞다투어 나서니 유난히도 시끌하다 정말 그들이 이 난마를 풀어낼 수 있을까? 차창 밖으로 스치는 ‘임대문의’ 글자들이 괜히 마음을 더 서늘하게 한다. 마트 진열대의 물가 앞에서 주부들의 시선 또한 점점 무거워진다. 바람이 전한다. 이제는
상처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주말 아침, 창밖 풍경이 유난히 맑다. 햇살에 부서지는 빛결 위로 ‘상처’라는 노랫말 하나가 잔물결처럼 번져온다. 그 말의 울림이, 오래된 기억의 결을 건드린다. 살아오는 동안 몸은 숱한 생채기를 견뎌왔다. 가시덩굴에 긁히고, 넘어져 무릎과 얼굴에 남았던 자국들. 그때의 아픔은 사라졌으되, 흔적은 어느새 기억으로 굳어 있다. 상처는 지워지지 않고, 다만 다른 이름으로 남는다. 선산 자락에서 유실수를 전지하던 날, 잘려나간 가지의 자리를 오래 바라보았다. 곧게 뻗은 생장을 끊어낸 자리에는 두툼한 살이 돋아나 있었다. 상처는 닫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결로 조직되고 있었다. 버려낸 만큼, 나무는 더 균형 잡힌 형상으로 서 있었다. 지난 장마에 패였던 황구지천 물길 또한 그러하다. 무너진 천변 위로 풀꽃이 다시 자라고, 바람은 그 위를 스치며 흐름을 되돌린다. 자연은 상처를 지우지 않는다. 그 위에 시간을 겹쳐 또 하나의 질서를 만든다. 몸의 상처는 세월 속에 흐릿해지지만, 마음의 상처는 쉽게 마르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마저 나를 이루는 결이 되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상처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형태를 바꾼다. 잘린 자리마다 생명은
문자의 마력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인간은 제때에 제 모습을 피워내는 존재다. 비단 인간뿐이랴. 모든 생명은 저마다의 시기에, 고유한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그러나 그 ‘제때’와 ‘제모습’에 이르는 길은 결코 순탄치 않다. 표현의 어려움은 곧 소통의 단절로 이어지고, 이는 삶의 본연한 기쁨마저 멎게 한다. 선천적 조건은 물론, 환경과 경제적 제약 또한 그 벽을 높인다. 소통은 표정과 몸짓에서 시작된다. 이어 소리가 더해지고, 문자는 이를 확장하며 인간 사유의 지평을 넓혀왔다. 글자는 단순한 기록 수단을 넘어 기호와 숫자, 그리고 사고의 구조를 담아내는 그릇이 되었다. 인류 문명 또한 동굴벽화에서 문자에 이르기까지, 소통 방식의 진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디지털과 영상 중심의 시대에 접어들며, 이토록 정교해진 문자 체계는 다시 압축과 직관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긴 문장보다 짧은 기호와 이미지가 더 빠르게 의미를 전달하는 시대, 우리는 다시 ‘본질적 표현’으로 회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훈민정음이 소리 생성의 알고리즘이었다면, 이제는 공간을 구성하는 새로운 언어가 등장하고 있다. 이른바 ‘공간언어’, ‘우주언어’로 불리는 홀릭
약자의 시선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세상에 조용한 날이 과연 있기나한가? 머나먼 호르무즈 해협에서 비롯된 국제 정세의 파장이 어느덧 우리의 일상 깊숙이 스며들었다. 그 여파일까. 국내의 경제, 국방, 외교, 사회 전반에 걸쳐 갈등과 충돌의 언어가 일상이 되어버렸다. 생존이 걸린 문제 앞에서 ‘상생’과 ‘공생’은 책 속에 꽂힌 채 꺼내 들기조차 버거운 단어가 되었다. 마치 겨울을 지나 바싹 말라버린 시래기처럼, 존재는 하지만 생기를 잃은 채다. 문득 백치 아다다와 벙어리 삼룡이가 떠오른다. 정상이라 불리지 못했던 이들, 그러나 누구보다 순수했던 존재들. 그 순수함은 보호받지 못했고, 오히려 세상의 냉혹함 속에서 더 쉽게 부서졌다. 지금 우리의 사회 역시 다르지 않아 보인다. ‘왜’와 ‘어떻게’라는 질문은 점점 사라지고, 시스템이라는 이름 아래 개인은 분절된다. 조직은 커지고, 개인은 작아지며, 결국 집단의 힘은 개인의 희생을 당연한 것으로 만든다. 질문이 사라진 자리에는 어둠이 깃든다. 말을 업으로 삼아야 할 자리에서조차 사물의 본질을 보지 못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권력을 향해 고개를 드는 ‘해바라기’들이 줄지어 선다고 한다. 거리에는 사계절 내내 현수막이 나부
가슴이 설레는 말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세상에서 가장 가슴을 설레게 하는 말은 무엇일까. 곰곰이 떠올려보면, 결국 ‘어머니’라는 말에 이르게 된다. 여자아이가 여인이 되고, 마침내 어머니가 되어가는 그 여정. 그 속에는 한 사람의 인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늘 저만치 앞서 걸어가며 길을 열어주고, 끝내는 한 세상을 다하여 돌아가시는 우리네 어머니들. 그 뒷모습을 떠올리면, 문득 한 노랫말이 가슴을 파고든다. “고달픈 인생 길을 허덕이면서 아, 참아야 한다기에 눈물로 보냅니다, 여자의 일생…” 그 애잔한 울림이 지금껏 귓가에 머문다. 그런 ‘어머니’를 떠올리던 중, 필자에게 또 하나 가슴 설레는 말을 만나게 되었다. 바로 ‘청춘’, 그리고 ‘청년’이다. 모교 졸업생들이 모여 만든 한 모임의 이름이 아이러니하게도 ‘청년’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여섯마디 후반에 이른 나이임에도, 그 이름 하나만으로도 모임에 나설 때마다 마음만은 다시 젊어진다. 두 돌을 맞은 그 모임에서 은사님과 재학생, 학생회장단, 운동선수단 후배들, 외부손님들과 한자리에 모여 나눈 정담은 마치 삶의 열두마디 가락 중 힘차게 울려 퍼지는 앞마당 같았다. 그 자리에는 생동하는 기운이 있었고, 세월
유붕자원불역낙호아(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먼 곳에서 벗이 찾아오니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오랜 세월을 건너 다시 만나는 인연 앞에서 이 말은 더욱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달포전 약속된 군동기생들의 문화탐방, 관내 융·건릉을 찾았다. 젊은 시절 푸른 제복을 입고 청춘을 함께했던 이들, 그 이름만으로도 가슴 한켠이 따뜻해진다. 융·건릉은 유네스코에 등재된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역사적 의미를 넘어, 이곳은 누구에게나 열린 사색의 공간이다. 인기 드라마 속 군주(이산)의 서사와 달리, 오늘의 이곳은 고요한 산책길로 우리를 맞는다. 진달래와 개나리, 솔과 참나무가 어우러진 봄의 풍경 속에서 바람마저 부드럽게 흐른다. 자연은 계절을 노래하고, 사람은 그 속에서 지난 시간을 떠올린다. 해설사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정조라는 인물이 단순한 군주를 넘어 개혁가이자 사상가, 그리고 인간적인 고뇌를 지닌 존재로 다가온다. 화성을 중심으로 한 도시 구상과 지역 개발은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동기생 중 한 명의 해설이 이어지며 탐방은 더욱 풍성해진다. 각자의 삶을 살아온 이들이 한 자리에 모여 같은 풍경을 바라본다는 것, 그 자체가 이미 하나의
자연·생태와 홀릭큐브-홀릭큐브32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우리는 자연을 바라본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 안에서 우리 자신의 삶을 비추어 본다. 황구지천을 따라 흐르는 물길과 들판, 바람에 흔들리는 풀잎은 서로 다른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질서 속에 놓여 있다. 자연은 분리된 개체가 아니라 연결된 구조다. 홀릭큐브의 시선으로 자연을 들여다보면, 모든 생태는 ‘점’에서 시작된다. 민들레 씨앗 하나, 물방울 하나와 같은 미세한 존재는 이미 완전한 가능성을 품고 있다. 이 점들은 이어져 ‘선’이 되고, 물길과 바람, 생명의 이동이라는 흐름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흐름은 들판과 숲, 습지라는 ‘면’으로 확장되며 생명들이 함께 살아가는 터전을 형성한다.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자연은 다시 ‘입체’로 나아간다. 비가 내려 땅으로 스며들고, 증발해 구름이 되어 돌아오는 순환 속에서 생명은 끊임없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한다. 이 모든 과정은 결국 ‘관계’로 완성된다. 꽃과 나비, 물과 물고기, 그리고 인간과 자연이 서로 기대어 존재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환경 문제는 이 관계의 단절에서 비롯된다. 흐름을 막고, 순환을 끊고, 연결을 잊어버린 결과다. 자연은 끊임없이
동양고전(철학구조)과 홀릭큐브–홀릭큐브31 사유로 완성되는 구조의 길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우리는 동양고전을 통해 사유의 뿌리를 만난다. 노래가 감정을 흔들고, 영화가 삶을 비춘다면, 고전은 존재를 묻고 길을 제시한다. 수천 년을 건너온 문장들은 인간과 세계를 꿰뚫는 구조의 언어다. 홀릭큐브가 말하듯 점은 선이 되고, 선은 면이 되며, 마침내 입체로 확장된다. 동양고전은 그 구조를 사유로 완성한다. 존재의 시작, 점은 근원에 대한 물음이다. <도덕경>은 “도는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이라 말하며 모든 것 이전의 하나를 가리킨다. 이어 <논어>는 인간의 도리와 관계를 통해 삶의 방향을 선으로 이어간다. 개인의 물음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면으로 확장된다. 이제 구조는 사회로 나아간다. <맹자>는 인간과 공동체의 정의를 말하며 사유를 입체로 세운다. 그러나 삶은 언제나 균열을 품는다. <장자>는 경계와 분별을 하물며 우리가 붙들고 있던 구조의 흔들림을 드러낸다. 이 균열 속에서 우리는 다시 자신을 돌아본다. 그리하여 시선은 확장된다. <반야심경>은 “공”의 사유로 존재를 비우며 새로운 구조를 연다. 나와 세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