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부도 갈매기와 댄싱을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섬, 참으로 정감 어린 낱말이다. “바다로 완전히 둘러싸인 땅, 대륙보다 작고 암초보다는 큰 것.” 그 말을 떠올리면, 가슴이 멍멍해져 문득 발길이 닿고 싶은 곳이 된다. 어느 시인은 말했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나는 수없이 곱씹는 끝에 이렇게 쓴다. “바다에는 섬이 있다.” 우주 바다에 떠 있는 작은 섬, 지구. 그 섬에 사는 사람들 사이에 또 섬이 있다. 새 단장을 마친 물길을 건너 들어선 제부도 풍경은 아늑하다. 오후 네 시 반, 드디어 제부리에 닿았다. 곧 열릴 <제2회화성영화제>의 현장이다. 매바위 곁에서 열었던 작은 색소폰 연주회, “달팽이 갈매기와 춤추다”가 문득 떠올라 나는 노을빛 해변을 따라 걸었다. 제부도의 품은 태고의 지층과 넓은 개펄, 엄마 품 같은 신비로움을 가득 안고있다. 동남쪽 바다에 부산갈매기, 기장갈매기가 난다면 서해 경기만에는 제부도 갈매기가 날고 있다. “님 그리워 하루에 두 번 물길을 여는 제부도.” 그 바다 위에서 갈매기들은 손님맞이 날갯짓이 분주하다. 노을을 배경으로 자동차 홍보영상을 촬영하는 외국인 모델의 미소 또한 섬에 어울린 제멋이다. 순간, 조나단
해야 솟아라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돈키: 일어나, 어여 일어나. 새해 봐야지! 호새: 일출 보느라 피곤한 몸 추스르며 새벽잠 설친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가을이 깊어가네요. KTX 타고 이곳까지 오니 세상 참 좋아졌어요. 돈키: 그래, 최소한 이틀 여정이 이제는 한나절 거리의 쉼터가 되었지. 호새: 인간에게는 새해가 있을지 몰라도, 자연은 늘 그 자리에 있는 거라 말씀하셨죠. 돈키: 그러니 푸근한 자연을 벗 삼아 마음이 뉘어져 편안한 거야. 눈부시게 떠오르는 해도 늘 그 자리에 있는데, 우리 눈에만 새롭게 보일 뿐이지. 시각을 통해 황홀한 햇살과 온몸이 젖어드는 촉감을 느끼고, 그로 인해 벅차오르는 감정을 맞이하는 거야. 영적 감각을 지닌 분들은 아침마다 어둠을 비집고 깨어나는 해의 숨소리를 듣는다고 하지. 호새: 그래서 그 깨어나는 해의 기운을 맞으려 이곳에 오는 모양이군요. 돈키: 해가 깨어나니 내 가슴에도 차오르는 그 무엇으로 내 자신도 깨어나는 거야. 호새: 그런데 왜 하필이면 정동진(正東津)이죠? 돈키: 응, 서울 중심에서 정확히 동쪽 중앙에 위치한 나루란 뜻이지. 이왕이면 청정심(淸淨心)의 표상인 바른 마음가짐으로 새해를 정동진에서 맞는 게 의
가을 아침햇살-천변기행17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아침 산책길의 공기가 산뜻하다. 밤새 내린 비로 냇물은 불어나고, 모래톱에는 청둥오리들이 납작 몸을 낮추어 있다. 동녘 햇살을 향해 고개를 치켜든 가마우지의 모습 또한 눈에 들어온다. 저 생명들은 왜 저런 모양새로 있는 것일까. 걷다 보니 스스로에게 묻는다. 갓 퍼지지 않은 햇살 아래, 제 얼굴을 드러내는 꽃들이 눈길을 붙든다. 아내가 일러준 이름들은 낯설면서도 정겹다. 애기나팔꽃, 둥근잎 유홍초, 도깨비가지, 돌동부…. 봄부터 헤아려본 꽃들이 수십 종이라 이제는 천변 꽃도감을 만들어야 할 듯하다. 어제 능행차 행렬에서 보았던 붉음, 노랑, 파랑, 하양의 깃발빛이 이 꽃빛과 겹쳐 떠오른다. 토종과 귀화종이 어우러져 풀섶에 스며들 듯, 산책길의 운치를 더한다. 문득 울긋불긋 수숫대가 시선을 붙든다. 어린 시절 기억을 소환한다. 또래들과 파란 하늘을 향해 쏘아 올리던 화살, 예쁘게 만들던 수수깡 안경, 돌상에 올랐던 수수떡, 수수빗자루, 수수엿…. 오래전 동화 속 <해와 달이 된 오누이>까지 끌려오니, 참으로 오랜만의 해후다. 저만치 앞서 걷는 이의 뒷모습이 원근감을 만들어내니, 그 또한 가을의 정취다.
강원도 아리랑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호새: 강릉시청까지 스물두 리, 산기슭 박물관은 열 리 남았네요. 오후 세 시까지 닿아야 하니 발걸음이 재촉돼요. 돈키: 고갯마루에선 뛰어야지. 옛날 선비들은 굽이마다 곶감 하나, 아흔아홉 개를 먹어야 정상에 닿는다고 했다지. 그래서 대관령이야.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호새: ‘대굴대굴 구르는 고개’라는 이름도 있잖아요. 고갯길 굽이마다 굴곡이 깊은 까닭이겠지요. 돈키: 그래도 이 고개를 넘으면 동해가 한눈에 안겨. 푸른 물결이 가슴을 시원히 열어주지. 이백오십 리 걸어와 닿으니 감격이 솟아오른다네. 아리랑 고개여…. 호새: “인생 굽이 몇 굽이냐”는 노랫말처럼, 우리 삶도 굽이굽이 고갯길이죠. 어머니들도 자식 키우며 얼마나 많은 인생고개를 넘으셨을까요. 돈키: 그래. 누구나 한번쯤은 고개를 넘어야 하지. 대관령에 서니 지난 날이 아리랑 가락처럼 밀려오네. 아리 아리 아라리요…. 호새: 괴테는 “눈물 젖은 빵을 먹지 않은 자, 인생을 말하지 말라”고 했다죠. 대관령을 넘은 이라면 아마 이렇게 말할 거예요. “아흔아홉 구비를 넘지 않은 자, 인생을 논하지 말라.” 돈키: 허허, 그 말 또한 아리랑이네. 강릉 벗이 전해
한강의 근원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호새: 집에서 마시는 상수도 근원이 오대산이라면서요? 돈키: 그렇다네. 정상인 비로봉이 해발 1156미터야. 백두대간 줄기라 등산객들이 많이 찾아가지. 두물머리에서 본 남한강 물줄기의 일부가 바로 여기서 시작해 흘러간 거야. 호새: 와… 그 물이 여기서부터 흘러간다는 게 신기하네요. 얼마나 걸려 흘러갔을까요? 돈키: 글쎄. 사실 얽매인 일상의 울타리를 잊으려 집을 나섰는데, 오히려 시간을 헤아리게 되더라고. 오르막 산자락엔 소나무, 잣나무, 떡갈나무… 이름 모를 풀꽃들이 발길을 붙잡아. 사람 손길이 덜 닿은 곳이라 제 모습대로 자라나 참 자연스럽지. 호새: 산책길 분위기가 그려지네요. 돈키: 해발 800m쯤 오르니 조용해.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고, 차량도 인적도 드물어 아침 산자락이 고요하더군. 그 순간, 오랜만에 고독이 찾아와 내 안의 나를 만났지. "왜 이 길을 걷고 있나?" 스스로 묻는데, 출발시 마음이 산새소리처럼 스쳐가더라고. 호새: 다시 걷고 싶어도 쉽지 않은 길일 것 같네요. 돈키: 그럴거야. 심심할 틈 없는 산책길이야. 매미가 허물을 벗듯 하얀 살결의 자작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는데 마치 지친 몸을 풍욕하는 듯
함께 그리다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동탄복합문화센터에서 여러 단체들이 저마다 특색 있는 공간을 꾸며 휴일 힐링 가족 맞이 행사를 열었다. 흰 천 위에 여러 색 크레파스로 마음을 그려보는 필자가 소속된 코너가 눈에 띈다. 몇번이나 제몫을 못한 탓에 봉사를 위해 하루를 내놓은 날, 서둘러 나섰으나 장소를 착각해 30분 지각을 하고서야 도착했다. 어린 시절, 흰 도화지에 하늘과 해, 구름과 나무, 꽃과 풀, 소와 토끼를 그리던 미술시간이 떠올랐다. 그때의 웃음소리가 울타리에 앉은 참새 재잘거림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지금 아이들의 그림은 사뭇 다르다. 로봇, 배, 자동차, 인형, 강아지…. 젊은 부모들이 아이와 함께 그림을 그리거나 곁에서 바라보는 모습이 참 다정하다. 오빠, 누나, 아빠, 엄마 얼굴도 종종 등장한다. 핵가족 사회이지만 가족사랑은 여전히 든든히 자리하고 있구나 싶다. 점이 선이 되고, 선이 모여 면이 된다. 그 면에 빨강, 파랑, 까망, 노랑 색깔이 채워져 가니 자동차, 하늘, 머리, 가방으로 살아난다. 빨강 자동차에 동그라미 두 개를 붙이니 금세 달려가고, 파랑 하늘 틈새에 흰 구름이 걸린다. 까만 머리를 동그랗게 말아 올린 건 아마도 엄마의 파마일
바다를 지배하는 자, 세계를 지배한다. 15세기, 명나라의 황제 영락제는 바다의 가능성을 일찍이 알아본 인물이었다. 그는 국력을 과시하고 해상 교역을 장려하고자, 환관 정화(鄭和)를 대장으로 임명해 전례 없는 규모의 대항해를 감행한다. 240척의 선박, 2만 5천 명의 인원을 이끌고 아시아 ,중동, 인도, 아프리카까지 7차례에 걸쳐 항해를 이어간다. 당시로서는 상상조차 어려운 해양 원정이었다. 하지만 영락제가 세상을 떠나자, 새로운 정권은 배의 설계도를 불태우고 항해 자료를 폐기했다. 정화(鄭和)의 탐험은 역사 속에 묻혔고, 명나라는 해양 진출의 기회를 스스로 포기한 셈이 되었다. 이 결정의 결과는 뼈아팠다. 바다로 나아가지 못한 명나라는 북방 여진족 청나라에 의해 멸망했고, 그 뒤를 이은 청나라도 서구 열강의 해양력 앞에 홍콩과 마카오를 빼앗긴 뒤 몰락의 길을 걸었다. 결국, 바다를 소홀히 한 제국은 하나같이 쇠락했다. 역사는 분명한 메시지를 남긴다.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나라다. 지정학적으로 불리하다는 평가를 받던 이 작은 반도국가는, 해상 물류와 교역을 기반으로 세계 10위권의 무역 강국으로
물레방아 도는 생태촌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호새: 둔내에서 진부 가려면 봉평 방면으로 우회하는 도로가 있대요. 근데 그냥 6번 도로 타고 가기로 했어요. 돌아오는 길에 들러도 될 것 같아요? 돈키: 그래, 아쉬움은 상상으로 채우면 되지. 봉평은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덕분에 유명한 고장이지. 허생원과 동이, 물레방아, 장터내 정취…. 그 시절의 로맨스가 다 들어있어. 호새: 오! 봉평은 5일장이 열린다면서요? 돈키: 글쎄, 재래장이야말로 먹거리, 풍물, 이야기, … 있을 건 다 있는 문화공간이지. 호새: 지금도 메밀의 먹거리가 인기가 있다네요? 돈키: 그럼, 여름철 더위 식히는 데는 메밀국수, 메밀전병이 최고지. 흐드러진 메밀꽃밭 걸으며 메밀 막걸리 쨍하며 한 사발 쭈욱 들이키면 금상첨화 아니겠어? 물레방아도 쉼 없이 돌아가니 운치있고, 보름달 휘영청 밝은 날에 하얀 메밀밭 둔덕에서 흰머리 뽑는 아내에게 이팔청춘 기운 좀 불어넣고 싶다니까. 호새: 근데, 요즘 연애는 다 LED 조명 반짝이는 데서 한다던데… 돈키: 그렇지, 허나 그건 좀 인공적이잖아. 산골 물레방앗간에서 사랑 나누는 게 진짜 로맨스지. 산새소리, 물소리, 흙내음 속에 초롱초롱
동서를 연결하다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호새: 동서를 잇는 영동고속도로! 참 감회가 새롭네요. 돈키: 그래, 고갯마루 정상에 세워진 개통 기념비가 백두대간의 기상처럼 우뚝 서 있지. 수도권과 강원도의 생활경제를 완전히 바꿔놓았어. 호새: 길이 길을 열어간다는 말이 딱 맞아요. 가지가 뻗고, 줄기가 이어질 듯 강원도의 척박한 땅도 관광, 레저, 힐링의 공간으로 변했잖아요. 돈키: 맞아. 고랭지 채소, 수산물, 특산물이 수도권으로 공급되니 농민 삶도 달라지고. 이제는 지인들도 강원도에 농가나 세컨하우스를 두고 있더라고. 호새: 그러고 보니 대학생 시절이 생각나요.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어깨동무하고 부르던 ‘고래사냥’!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 봐도~ 자, 떠나자 동해바다로~” 그 흥겨움이 강원도 여행의 시작이었죠. 돈키: 그 청년들이 어느덧 중년 고개를 넘어, 이제는 쉼터를 찾아 강원도로 발길을 돌리지. 봄맞이, 피서, 단풍놀이, 스키… 사시사철 즐기는 레저 공간이 됐으니. 호새: 예전엔 “이래요” 같은 방언과 옥수수, 감자 같은 구황식품이 먼저 떠오르던 강원도였는데, 영동고속도로가 열리자 국민 관광지가 되어버렸어요. 돈키: 그렇지. ‘팔도사투리 경연대회’도
가을을 보내며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호새: 가을이 깊어가니 맘이 서늘하네요. 강원도에 산이 많아 곧 울긋불긋한 단풍이 번지겠네요. 돈키: 그래, 9월이 오는 소리려더니 어느새 10월이 성큼 다가섰구나. 호새: 이제 산중으로 들어서니, 그간 유람하며 묻어둔 마음자락 시 한 수 읊어보면시면 어떨까요? 돈키: 중장년에 접어든 인생길의 감회가 이 가을에 제격이지. 앞이 캄캄하던 시절에 끄적이며 다듬었던 글, 오늘은 그 시를 내어 놓을까. <가을을 보내며> 노란 국화이고 싶다. 놓을 수 없는 정에 살을 에인 오래된 상처, 햇살에 온몸 드러낸 채 거친 바다에서 돌아온 노인처럼, 가슴에 쌓인 말로는 다 못할 노래들. 만날 날, 노란 국화이고 싶다. 세월의 제 모습 이려니, 봄날 두 손 모은 기도는 물결 따라 멀어져 가는데, 내 안에 든 너는 아슴한 향기의 가을을 남긴다. —— 시집 그대가 향기로울 때 中 호새: <가을을 남기고 떠난 사랑> 중 “눈물로 쓰여진 그 편지는 눈물로 다시 지우렵니다”라는 구절이 떠오르네요. 돈키: 그렇지. 저 높푸른 가을 하늘에 흰 구름이 참 곱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