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주치마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호새: 달포 전에 약속된 일정이라, 비가 와도 가는군요? 돈키: 그래, 젠틀맨 은회장, 작은 거인 송회장, 그리고 나. 오래 사귄 건 아니지만 이래저래 어울리다 보니 대화가 물 흐르듯 흘러. 호새: 은회장님, 본관이 행주라면서요? 은회장: 맞아요. 돈키: 행주 하면 뭐가 제일 먼저 떠오르시오? 은회장: 글쎄… 행주산성, 행주치마, 행주대첩, 행주대교 정도지. 송회장: 고양시 행주라… 그 넷이 다인가요? 돈키: 아니지. 행주가 낳은 은회장도 있잖소. (웃음) 호새: 초행길이라 설레네요. 한 시간쯤 걸리겠죠? (휘리릭) 돈키: 봐라, 이 성은 4국시대 축성 기법이 남아 있단다. 한성 가까이 위치해서 옛날부터 전략적 요충지였지. 호새: 임진왜란의 3대 대첩, 바로 행주대첩(幸州大捷)이 벌어진 곳이군요? 돈키: 그렇지. 권율 장군의 지략, 관군 화포의 위력, 치마부대 아낙네들의 돌멩이 지원이 어우러져 왜군의 기세를 꺾었지. 저 높게 솟은 대첩비를 보아라, 승전의 표상이 따로 없구나. 호새: 저기, 빗방울에 젖은 행주대교 위로 자동차들이 물방개처럼 달리네요. 돈키: 그래. 저 사람들, 내 땅의 힘을 돋우기 위해 제 일터로 가는 게지. 다
수원천 송가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호새: 드디어 광교산 정상에 올랐네요. 참, 바람이 상쾌해요. 돈키: 그러게, 사방이 탁 트여 시원하구나. 이곳은 용인시와 의왕시, 수원시가 맞닿는 경계에 명산이지. 호새: 잠시 쉬어 가는 김에, 이곳까지 이르며 떠오른 시상을 한번 들려주시면 어떨까요? 돈키: 음, 10여년전 이곳을 출발해 수원천 줄기가 황구지천에 흘러들어 한몸을 이뤄 평택호에 이르는 물길을 따라 걸었어. 그때 눈길에 담아둔 감정이야. <수원천 송가> 아득한 옛적, 하늘이 열렸더라. 큰 땅에서 바다에 이르도다. 한울림 흘러내려 백두대간이라 하고 그 한 줄기 자락에 솟은 묏 방울을 할배 할매들은 광교산이라 부르네. 넉넉한 품, 가르침의 품이런가. 어미의 새벽 정성이 하늘에 닿아 산정수리, 시루봉에 한 방울 굴러내려 풀꽃이 피어나고, 두 방울 이어 흐르니 새들도 노래하네. 가슴 설레는 이백리 물길여정 형제봉 아침 햇살 고운 단장에 물오리는 선남녀 눈길을 어루는데 나그네 발길은 물길 따라 흐르누나. 오호라, 문밖이 무릉도원, 화홍이려 아이들 웃음소리 물보라로 피어나고, 팔달청람에 산들바람이 불어오니 새색시 꽃가마 나불대는 버들이로세. 두물머리 물길, 잠
화성대문을 열다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호새: 팔달문은 화성의 남문이라 들었습니다. 동란의 참화에도 그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네요. 돈키: 그래. 옛사람들은 “남문은 남아 있고, 북문은 부서지고, 서문은 서 있고, 동문은 도망갔다” 하며 우스갯소리가 전해오지. 그 말 속에 세월의 격랑을 견뎌낸 문들의 운명이 깃들어 있어.. 호새: 오늘은 창룡문 아래에서 윤규섭 선생의 해설을 들었다지요? 돈키: 그래. 화성의 역사와 사연을 품은 말씀에 귀 기울이다 보니 정오를 넘겼다네. 지동시장에서 순대국밥 한 그릇에 반주를 곁들이니, 가벼운 취기에 마음마저 느슨해져 흘러가는 강물 같더구나. 호새: 시장통 정조대왕 좌상 앞 ‘불취무귀(不醉無歸)’라는 글귀가 더욱 깊게 다가왔겠아요. 돈키: 그래, “취하지 않으면 돌아가지 말라.” 축성의 고단함을 위로한 임금의 말씀이지. 그 속에는 백성을 편안케 하지 못한 자책 또한 스며 있네. 왕의 무거운 심회를 술 한 잔 속에 녹여낸 것이야. 호새: 서장대 북소리를 상상하니 옛 군례의 장면이 눈앞에 어른거립니다. 돈키: 둥둥, 북소리에 가슴이 뛰네.나도 문 안으로 들어서며, 시공을 거슬러 이백 년 전 정조시대에 발을 딛는 듯해. 호새: 팔달문이
대한국민에게 고함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오늘 아내와의 약속대로 독산으로 아침길을 나섰다. 발밑에 채이는 나무뿌리와 코끝에 스미는 솔향이 함께 어우러져 산뜻하다. 산책을 하다 보면 헐렁한 몸짓에 소소한 생각들이 이어져, 감각의 세계와 정신의 세계가 맞닿는 순간이 있다. 평소 풀리지 않던 고민이 번뜩이는 영감으로 풀리곤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걷다 보니 정치권의 장면이 떠오른다. 어제 본 야당 전당대회의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 단상 위에서 열정을 토하는 목소리를 들으며, 민주주의 제도의 본질이 무엇인지 되묻는다. 두 사람 이상이 모여 사는 집단이 사회다. 생존을 위한 먹거리 해결과 갈등의 조정은 정치의 본령이다. 정부에 권한을 위임하고, 정치인은 정당을 통해 권력을 행사한다. 권력남용을 막기위해 입법·행정·사법의 3권 분립, 견제와 균형은 국민행복을 위한 최소한의 장치다. 우리는 지난 100년간 기적 같은 변화를 경험했다. 왕조에서 제국으로, 식민지에서 독립국가로, 빈곤에서 경제부국으로. ‘한강의 기적’은 세계를 놀라게 했다. 그러나 정치권은 언제나 그늘을 핑계 삼아 새로운 갈등의 나이테를 만들었다. 갈등 자체야 사회의 숙명이라지만, 지금의 정쟁은 도를 넘었다
수원천 서해로 간다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호새: 와, 드디어 수원천의 물길, <화성>에 닿았네요. 저 문이 화홍문이죠? 돈키: 그래, 성 밖에서 안으로 드나드는 북수문이야. 문이란 게 늘 경계를 나눠. 안과 밖, 이승과 저승, 의식의 문턱 말이다. 학창시절, 창문 너머 비 오는 모습을 보며 또 다른 세상에 간 듯 했던 기억이 떠오르지 않니? 호새: 아, 그래서 “대문 밖이 저승일세” 같은 회심곡 가락이 가슴에 와 닿나봐요. 돈키: 그렇지. 문 밖의 세계는 늘 자유의 기운을 품어. 호새: 황구지천 근처엔 옛 성이 여럿인가봐요. 돈키: 고읍성, 독산성, 그리고 정조가 축성한 화성이 있어. 특히 수원화성은 정약용이 ‘성설’에 기술한 바처럼 전통과 새로운 공법이 결합된 명작이지. 거중기, 벽돌, 녹로 같은 신기한 장치로 공사기간을 줄였다지. 호새: 역사책이 아니라 눈앞에 펼쳐진 느낌이 달라요. 저기 보이는 무지개 아치, 정말 멋집니다! 돈키: 저게 바로 화홍문, 일곱 개의 무지개 모양의 수문이지. 여름날이면 물보라가 햇살에 부딪혀 무지개를 만들곤 해. 수원팔경의 하나, ‘화홍관창’이라 불렸어. 오른편 언덕에 있는 방화수류정도 보이지? 호새: 네! 천변의
독산성 둘레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호새: 조선 선비들은 유람길마다 시 한 수를 남겼다지요. 이곳이 사방이 트여 시 한 수 어떠세요? 돈키: 그래, 곳곳에 기행시와 서체, 무용담이 전해오지. 그게 다 인생길의 멋 아니겠느냐. <독산성에서> 한걸음 두걸음 머언 발길들 불어라 들바람 고개 너머로 금암리 선인들 머문 쉼터에 천년의 고인돌 고요 하구나 진달래 개나리 고운 몸단장 독산성 둘레길 노을이 지면 솔숲에 울리는 말울음 소리 그 이름 부르니 세마대로세 꽃뫼에 서린 애끊는 사부곡 화산뜰 감도는 황구지 물길 오신 곳 어느 뫼 어데로 가나 노을속 홀로 걷는 나그네여 달뜨는 밤이면 고향 가려나 눈감아 달려도 마음이 앞서 꿈엔들 잊으리오 내 고향 땅 죽미령 눈물꽃 젊은 넋이여 사방에 뻗어난 너른 큰길에 뜻세워 글읽는 배움터 불빛 어제를 돋우어 내일을 여니 온세상 밝혀 갈 등불이로세 —--졸저<한반도소나타>에서 호새: 돈키님, 이쯤이면 김삿갓 선생 못지않은 예인 아니겠소? 돈키: 글쎄, 주변 환경을 알면 누구나 한생각 들어설게야. 어찌 세상사가 제 뜻대로만 되더냐. “황하지수천상래…. 조여청사모성설…”을 인생을 노래한 청련거사 이백이나 방랑 시인 난고
세심대(洗心臺)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호새: 사방이 탁 트여 시원하네요. 한 바퀴 돌아볼까요? 돈키: 그래. 우리 세대에겐 초등학교 시절 소풍장소로 익숙한 곳이란다. 이 산성은 백제 시대에 쌓은 성인데, 정상엔 ‘세마대(洗馬臺)’라 불리는 정자가 있어. 임진왜란 때 권율 장군이 말을 씻겼단 전설로 그렇게 불린 거지. 호새: 아, 예전에 문화탐방 모임 따라 왔던 기억이 나요. 돈키: 그렇지? 이곳에 서면 고대에서 현대까지 이어진 역사가 한눈에 들어와. 동쪽으론 삼성반도체 화성단지와 동탄 신도시가, 그 옆으로는 붓끝처럼 뾰족한 필봉산이 보이지. 남쪽으로는 금암리 지석묘군과 물향기수목원, 공자를 모신 궐리사도 자리 잡고 있단다. 서쪽은 서봉산 너머로 석양이 스며드는 물길이 서해로 흘러가니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아. 북쪽으로는 황구지천 건너 화산뜰이 펼쳐지고, 그 위로는 미국 존슨 대통령이 다녀간 흔적을 기념한 ‘존슨동산’이 있지. 조금 더 가면 정조의 사부곡이 서린 융건릉과 원찰 용주사가 자리하고 있어. 저 멀리 수원 광교산과 팔달산에서 발원한 수원천이 수원비행장 아래에서 황구지천과 합쳐져 넓은 들을 가로지르며 흐르는모습이란다. 송산·양산·안녕뜰의 풍경이 너르게
제부도 연가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호새: 아버지, 여긴 하루에 두 번 물길이 열린다면서요? 신기해요. 돈키: 그래, 제부도야. 이름난 섬이란다. 저기 매바위며 고운 백사장은 명사오리라 부를만 하잖니? 산 위에서 맞는 밤바다의 적막은 세사에 찌든 영혼이 정화되는 심연에 이르게 하지. 마치 밤하늘 빛나는 별이 등대처럼 태고적 부터 걸어온 내게 가야 할 삶의 좌표를 일러준단다. 호새: 와… 시상이 절로 떠오르겠어요. 돈키: (미소 지으며) 맞아. 내 청춘 시절, 바로 이곳에서 노래를 만들었거든. 들어볼래? :돈키: (바다를 바라보며 노랫말을 읊조린다) <제부도연가> 나 홀로 찾아 왔어요 님이 그리워 하루에 두번 가슴을 연다는 제부도 길을 잃었소 바람 불었소 정녕 돌아올순 없나요 그대와 사랑을 속삭이던 매바위엔 눈물만 흐른다오 아아~ 보이나요 작은섬에 저 외로운 등대 들리나요 밤바다 울리는 파도소리가 내 영혼의 눈물인 것을 이젠 알것 같아요 사랑도 미움도 아픔이란걸 둘이 만나 산다는 의미를 둘이 만나 하나되어 살아가는 의미를….. ……졸저 <한번도소나타>국학자료원 2021년 11월 호새: (숨죽이며 듣다가) …가슴이 찡하네요. 돈키: 임마, 장
지도자의 정체성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정체성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일관되게 유지되는 고유한 실체”다. 안으로는 흔들리지 않는 동일성이며, 밖으로는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고유한 빛, 존재의 등불이겠다. 지도자에게 정체성이란 말과 행동이 하나로 이어지는 힘, 신념과 통찰이 삶으로 구현되는 무게다. 정체성이 없는 정치 지도자는 그저 스쳐가는 바람일 뿐이다. 지금 정치의 광장은 소란하다. 여권은 브레이크 없는 질주요, 야권은 전당대회라는 이름으로 전국을 돌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으나, 그 목소리 속에서 국민이 듣고자 하는 방향은 잘 보이지 않는다. 국민은 외양간을 단단히 고쳐 수레의 한축을 담당해주길 고대하건만, 한 지붕 아래 다른 빛깔들이 모인 탓에 흐려지고 있는 비전을 강조하면 울림이 있을게다. 세계 경제는 폭풍우 속에 있다. 기업은 살기 위해 껍질을 벗기고, 서민은 치솟는 물가와 불안한 일상에 가슴을 조인다. 어느 기업 총수가 강조한 말이 떠오른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야 한다.” 그만큼 절박한 시대이건만. 정치권의 언어는 여전히 가벼운 공방이다. 민생의 절규와 정치권의 언어 사이에 깊은 골이 생겼다. 정치가는 원래 국민을 설득하고, 국민을 깨우며,
알라딘 요술램프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호새: 와, 바닷길 따라 달리다 보니 여기 화성호 안길이네요. 그런데 저기 보이는 게 현대자동차 연구소 맞죠? 돈키: 그렇단다. 원래는 바닷가였는데, 방조제가 들어서면서 뭍으로 변했지. 그런데 그 땅 위에 세계 자동차 문화를 이끄는 두뇌들의 연구소가 자리 잡고 있으니 자랑거리가 아닐 수 없구나. 호새: 화성에 자동차 관련 시설이 꽤 많네요? 돈키: 마도에는 성능시험장이 있고, 우정에는 기아자동차 공장, 그리고 남양에는 현대·기아자동차차 연구소가 있지. 마치 미국의 실리콘밸리가 반도체·IT 기업으로 가득하듯, 화성의 남서부 지역은 자동차 산업으로 가득하단다. 그래서 나는 인근을 **모터밸리(Motor Valley)**라고 부르고 싶어. 호새: 모터밸리라… 멋지네요! 그런데 왜 하필 글제가 알라딘 요술램프예요? 돈키: 요술램프처럼 연구소에서 새로운 모델이 ‘펑! 펑! 펑!’ 하고 터져 나오잖니. 알라딘 램프에는 자동차가 없었지만, 이곳 화성에서는 세련된 자동차가 튀어나와 지구촌에 인기짱이잖아. 창조의 즐거움이란 정말 대단하지 않니? 호새: 그런데 방조제 공사로 사라진 포구들도 있죠? 돈키: 맞아. 호곡선창, 왕모대 같은 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