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패연을 날리다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돈키: “태백산 정상에서 팔월 한가위 소원맞이 방패연을 날리다”라는 제목, 기사로 내면 어때?
호새: 새벽 다섯 시부터 무슨 기사 타령이에요? 연이라면 동네 뒷동산이나 수원 연무대에서도 날릴 수 있잖아요.
돈키: 그래도 새벽에 신문 읽는 사람들이 있거든. 아침엔 생각이 깨어나는 법이지. 오늘은 원칙맨과 젠틀맨도 함께 산행할거야. 어, 저기 오네.
원칙맨: 새벽 공기가 참 상쾌합니다. 오늘 오름길이 기대되네요.
돈키: 천등산 휴게소에서 아침 먹고, ‘유일사’ 주차장에서 천제단까지 3.5km. 오후 여섯 시쯤이면 돌아올 수 있겠지?
젠틀맨: 아마 아홉 시쯤 도착할 듯합니다. 해발 1,567m라 날씨는 여기와 사뭇 다를 거예요. 자, 출발하죠! –휘리릭–
(비 내리는 산길)
원칙맨: 비옷을 챙겨야겠군요. 대학시절 여러 산을 오르며 배운 건, 결국 마음을 다잡는 일이었지요. 오랜만에 오르니 가슴이 가뿐합니다.
돈키: 태백산은 백두대간의 척추. 이름만 들어도 마음이 든든하지 않아? 태고의 품에서 한강과 낙동강이 흘러나왔으니 민족의 젖줄이 된 산이지.
젠틀맨: 그 품에 안긴다니 발걸음이 설레네요.
돈키: 《삼국유사에 따르면 환웅이 태백산에 내려와 신시를 열었다지. 오늘 우리가 걷는 이 길은 곧 태고로 향하는 길이야. 천제단 앞에 서면 단군 개국의 시간, 단기 4353년을 뛰어넘는 셈이지.
원칙맨: 맞습니다. 산맥이 뻗어가는 걸 보니 숨이 멎을 듯 장엄합니다. 해돋이 땐 절로 두 손이 모아지죠요.
돈키: 오늘은 비가 와 해를 못 보지만, 오르다 보면 지친 마음에 새 기운이 깃들 거야.
젠틀맨: 산의 덩치만큼 사람도 커지는 듯합니다. 저기 장군봉 바위기둥이 보이네요. 바람이 부니, 이제 연을 띄워 볼까요?
돈키: 비바람이 심한데 괜찮을까?
원칙맨: 연은 날려야 연이지요. 마음속 소원은 이미 하늘에 닿았으니 여기가 곧 하늘입니다.
돈키: 좋아. 방패연을 띄워 보자구! 어, 뜬다!
젠틀맨: 태백산 정상에서 태극문양 방패연을 띄우다니, 기네스북감 아닙니까?
돈키: 바람이 세차 오래 머물 순 없어. 주목 숲으로 내려가 점심 하자고. –휘리릭–
(하산길, 찻집)
원칙맨: 강원도에 오랜만이니 차 한잔 어때요?
젠틀맨: 저기 “길을 묻는 그대에게”라는 찻집에서 쉬었다 가죠.
돈키: 수원에서도 본 상호라 반갑네. 맑은 산기운에 한 잔 하자구.
젠틀맨: 돌아가는 길, 영월 솔고개 소나무도 큰 기운을 주지요.
돈키: 명산대천이 아니라도, 때때로 산은 올라야 해.
원칙맨: 한가위를 앞두고 잘 온 것 같습니다. 가족과 지인의 건강, 인류의 평안도 빌었으니 선인이 된 듯합니다.
돈키: 굽이치는 저 산능선을 보니 차오르는 게 있어. 그게 나를 지탱하는 힘이고, 이웃에게 건네는 밝은 기(氣)야.
원칙맨: 정상은 바람이거셌지는데, 여긴 햇살이 따뜻하네요.
돈키: 그렇지. 세상살이가 다 그런 거야. 자연이 스승이야. 오늘 태백산도 큰 울림을 주었어.
돈키: 척박하다고 홀대받던 강원도인데, 이제는 코리아를 먹여 살려. 농산물, 임산물, 축산, 수산에다 청정한 물길까지 내어주잖아.
젠틀맨: 맞습니다. 이제는 힐링의 웰빙터전이네요.
호새: 다들 좋은 말씀들 하시니 저도 한가위 소원을 빌었습니다.
“대보름 달님이시여, 한반도를 환히 비추어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