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장에 삿갓 쓰고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호새: 맹맹하니 두어 곡 뽑아봐요. 돈키: 좋지. “죽장에 삿갓 쓰고 방랑 삼천리…” “…미스김도 잘 있어요, 미스리도 안녕히~…” 호새: 지난번 <전원일기>에도 인용된 노래 말 같아요. “붓펜에 배낭 메고 유람 삼천리…” “…경포대도 잘 있어요, 정동진도 안녕히~” 이렇게 개사하면 괜찮겠네요? 돈키: 허허, 김삿갓 아니더냐. 그 삿갓은 단순한 차림이 아니라, 사람이 지닌 본성-양심의 상징이야. 술 한잔에 시 한 수 읊으며 세상을 유랑하던 시인, 오늘 그 자취를 따라 영월에 온거야. 이곳은 단종의 애사(哀史)가 깃든 청령포와 장릉이 있는 고장이야. 그 비감 속에서도 난고 선생의 해학은 바람처럼 웃음을 남기지. 호새: 듣자니, 몇 마디로 사람 마음을 풍선처럼 부풀려 웃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면서요? 돈키: 그건 재주라기보다 성품에 공부를 얹은 거야.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 힘들면 헛웃음이 나오는 법이지. 참된 웃음은 진심의 여백에서 피어난단다. 그분의 해학은 서민의 눈물 위에 핀 웃음꽃이었어. 호새: 그럼, 김형곤이도 그런 계보인가요? 돈키: 갑자기 웬 김형곤이야? 허허. 그렇구만. 그도 ‘공포의 삼겹살’
한가위, 부모의 마음을 생각하다 글 송용호 “자식은 부모가 세상을 떠나면 땅에 묻고, 부모는 자식을 가슴에 묻는다.” 누구나 아는 말이지만, 나이가 들수록 이 말의 무게가 깊게 느껴진다. 우리 집은 대대로 제사를 중시해온 유교 전통의 가풍을 지켜왔다. 그 중심에는 엄격하셨던 아버지가 계셨다. 나는 한때 성당에서 세례를 받고 신앙의 길에 들어서려 했지만, 명절날 아버지는 단호히 말씀하셨다. “집안의 장자인 너만큼은 종교의 자유가 없다. 제사를 모셔야 한다.” 그 말에 나는 신앙의 자유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세월이 흘러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지금은 집사람이 홀로 차례상을 준비한다. 장을 보고, 김치를 담그고, 음식을 장만하는 그 고단함을 곁에서 지켜보면 미안하고 고맙다. 요즘은 많은 집에서 명절을 간소화하거나 가족여행으로 대체하지만, 우리 집은 여전히 전통을 지킨다. 팔월 한가위는 가을 한가운데, 오곡백과가 무르익는 시기다. 그 풍성함 속에서 조상님께 감사드리고, 가족이 함께 웃는 시간이야말로 삶의 큰 축복이다. 나는 한때 줄기세포 기반 이종장기이식 기업을 운영하며 생명의 연장 가능성을 좇았다. 하지만 결국 인간의 삶은 유한하며, 하루하루를 감사히 살아가는
아리랑 고개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호새: 고갯길 오르니 산내음이 좋네요. 노래 한 곡조 뽑으시죠. 돈키: 좋지. 노래란 게 별거냐. 힘들어도 부르고, 슬퍼도 부르는 게 노래지. 산길에선 산노래가 제격이지. (조용히 흥얼거리며) “산에 산에 꽃이 피네, 들에 들에 꽃이 피네…” 호새: 그거 ‘산유화’잖아요? 돈키: 그래, 여러 이들이 작사하고 노래했지. 동산에 올라 휘파람 불며 부르면 참 좋아. 호새: 여긴 정선의 산고개잖아요. 뭐가 어울릴까요? 돈키: 글쎄, 뭘 부를까? 호새: 인생의 단맛 쓴맛 다 보고, 장터에서 곤드레밥도 먹었으니 ‘정선아리랑’이 딱이지요. 돈키: 아리랑! 좋지. 고개 오르기 전, 흥 좀 돋워볼까나. 호새: 그런데요, 밀양·진도 등 수많은 버전이 있다던데, 왜 그렇게 많을까요? 돈키: 부르는 사람과 시대마다 삶이 달랐으니 자연히 곡조와 말맛이 달라진 거지. 사랑과 애환, 노동과 정서가 배어 있는 게 아리랑이야. 그래서 세월을 건너도 통하지. 정선아리랑은 고려 때부터 전해왔다 하잖아. 작자 미상의 노래가 천년 세월을 버텼으니, 그게 바로 민족의 숨결이지. 호새: 부르면 좋고, 울면 위로되고, 춤추면 흥이 나는 노래네요. 돈키: 그렇지. 아리
한가위 추석에 비가오면 달님도 숨바꼭질 고향 길 질척이는 아스팔트 낮빛처럼 그리움 적시우는 수수닢 너풀거림도 산마루 넘어 오는 땅거미 드리워지면 손주들 보고픔만 도랑지어 흘러가듯 들녘에 세워져 있는 허수아비 옷자락 너풀거리는 춤사위도 멈추어진 비 내리는명절~
방패연을 날리다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돈키: “태백산 정상에서 팔월 한가위 소원맞이 방패연을 날리다”라는 제목, 기사로 내면 어때? 호새: 새벽 다섯 시부터 무슨 기사 타령이에요? 연이라면 동네 뒷동산이나 수원 연무대에서도 날릴 수 있잖아요. 돈키: 그래도 새벽에 신문 읽는 사람들이 있거든. 아침엔 생각이 깨어나는 법이지. 오늘은 원칙맨과 젠틀맨도 함께 산행할거야. 어, 저기 오네. 원칙맨: 새벽 공기가 참 상쾌합니다. 오늘 오름길이 기대되네요. 돈키: 천등산 휴게소에서 아침 먹고, ‘유일사’ 주차장에서 천제단까지 3.5km. 오후 여섯 시쯤이면 돌아올 수 있겠지? 젠틀맨: 아마 아홉 시쯤 도착할 듯합니다. 해발 1,567m라 날씨는 여기와 사뭇 다를 거예요. 자, 출발하죠! –휘리릭– (비 내리는 산길) 원칙맨: 비옷을 챙겨야겠군요. 대학시절 여러 산을 오르며 배운 건, 결국 마음을 다잡는 일이었지요. 오랜만에 오르니 가슴이 가뿐합니다. 돈키: 태백산은 백두대간의 척추. 이름만 들어도 마음이 든든하지 않아? 태고의 품에서 한강과 낙동강이 흘러나왔으니 민족의 젖줄이 된 산이지. 젠틀맨: 그 품에 안긴다니 발걸음이 설레네요. 돈키: 《삼국유사에 따르면 환웅이
거울아 거울아! 시인/영화배우 우호태 돈키: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옛날 동화 백설공주의 한 대목이야. “얼굴만 예쁘다고 여자냐, 마음이 고와야 여자지…” 예전 해병대 출신 미남 가수 남진이 불렀던 노래 말도 떠올라. 요체는 겉모습보다도 결국 마음(心)이 아니겠니. 호새: 사람이 나이 들면 눈이 뜨인다는 게 바로 철이 든다는 거겠지요? 돈키: 저 경포호를 보아라. 오대산과 대관령에서 굴러내린 물방울이 모여든 천년 세월을 품은 호수란다. 얼굴뿐 아니라 마음까지 비추는 거울 같은 곳이야. 네가 처음 약속한 대로 끝까지 주인을 받들 건지, 딴짓할 건지 다 드러나지. 호새: 아이고, 이 세상에 나 같은 충직한 놈이 또 있을까요! 주인님이 홍당무 몇 개만 줘도 집사 노릇 똑소리 나게 하잖아요. 내 허리 좀 보이소. 백두대간처럼 꼿꼿하지 않습니까. 주인님에게 뒷발차기 한 적이 있나요? 그나저나 요즘은 코로나가 눈으로도 옮는다던데, 까만 안경 쓴 이들이 왜 이리 많은지… 돈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오죽헌(烏竹軒)부터 들르자꾸나. 호새: 영화박물관에도 가봐요. “경포대에서 갈매기와 댄싱” 멋지지 않습니까! 돈키: 오죽헌은 신사임당과 율곡 선생의
자유, 그리고 대한민국의 정체성 송용호 ‘자유’는 인류가 오랫동안 갈망해 온 가치다. 그러나 우리가 말하는 ‘자유’는 하나의 의미로 정리되기엔 너무나 복합적이다. 영어로는 Freedom과 Liberty, 두 단어로 표현되지만, 그 본질은 분명히 다르다. Freedom은 개인이 타인의 간섭 없이 스스로의 의지대로 살아가는 상태다. 반면 Liberty는 사회적 질서와 타인의 권리를 존중하기 위해 때때로 자율성의 일부를 제약하는 ‘공동체적 자유’다. 오늘날 대부분의 자유주의 국가들이 채택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Liberty의 개념이다. 역사의 분기점, 1987년 6월 대한민국 현대사는 1987년을 기점으로 커다란 전환을 맞이했다. 6·29 선언은 군사정부와 민주화 세력이 이뤄낸 절묘한 타협이었다. 전 세계적으로도 권위주의 정권과 민주주의 세력이 평화적으로 권력을 공유한 사례는 흔치 않다. 이 타협은 대한민국의 정치적 토양을 바꾸어 놓았다. 이 시기를 전후로, ‘운동권’ 역시 분화하기 시작했다. 1987년 이전의 운동권은 반미·통일주의·민중해방을 내세운 이념 중심의 학생 운동 세력이었다. 이들은 ‘삼민주의투쟁위원회(삼민투)’를 주축으로, 대한민국 체제를 부정하고
제부도 갈매기와 댄싱을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섬, 참으로 정감 어린 낱말이다. “바다로 완전히 둘러싸인 땅, 대륙보다 작고 암초보다는 큰 것.” 그 말을 떠올리면, 가슴이 멍멍해져 문득 발길이 닿고 싶은 곳이 된다. 어느 시인은 말했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나는 수없이 곱씹는 끝에 이렇게 쓴다. “바다에는 섬이 있다.” 우주 바다에 떠 있는 작은 섬, 지구. 그 섬에 사는 사람들 사이에 또 섬이 있다. 새 단장을 마친 물길을 건너 들어선 제부도 풍경은 아늑하다. 오후 네 시 반, 드디어 제부리에 닿았다. 곧 열릴 <제2회화성영화제>의 현장이다. 매바위 곁에서 열었던 작은 색소폰 연주회, “달팽이 갈매기와 춤추다”가 문득 떠올라 나는 노을빛 해변을 따라 걸었다. 제부도의 품은 태고의 지층과 넓은 개펄, 엄마 품 같은 신비로움을 가득 안고있다. 동남쪽 바다에 부산갈매기, 기장갈매기가 난다면 서해 경기만에는 제부도 갈매기가 날고 있다. “님 그리워 하루에 두 번 물길을 여는 제부도.” 그 바다 위에서 갈매기들은 손님맞이 날갯짓이 분주하다. 노을을 배경으로 자동차 홍보영상을 촬영하는 외국인 모델의 미소 또한 섬에 어울린 제멋이다. 순간, 조나단
해야 솟아라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돈키: 일어나, 어여 일어나. 새해 봐야지! 호새: 일출 보느라 피곤한 몸 추스르며 새벽잠 설친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가을이 깊어가네요. KTX 타고 이곳까지 오니 세상 참 좋아졌어요. 돈키: 그래, 최소한 이틀 여정이 이제는 한나절 거리의 쉼터가 되었지. 호새: 인간에게는 새해가 있을지 몰라도, 자연은 늘 그 자리에 있는 거라 말씀하셨죠. 돈키: 그러니 푸근한 자연을 벗 삼아 마음이 뉘어져 편안한 거야. 눈부시게 떠오르는 해도 늘 그 자리에 있는데, 우리 눈에만 새롭게 보일 뿐이지. 시각을 통해 황홀한 햇살과 온몸이 젖어드는 촉감을 느끼고, 그로 인해 벅차오르는 감정을 맞이하는 거야. 영적 감각을 지닌 분들은 아침마다 어둠을 비집고 깨어나는 해의 숨소리를 듣는다고 하지. 호새: 그래서 그 깨어나는 해의 기운을 맞으려 이곳에 오는 모양이군요. 돈키: 해가 깨어나니 내 가슴에도 차오르는 그 무엇으로 내 자신도 깨어나는 거야. 호새: 그런데 왜 하필이면 정동진(正東津)이죠? 돈키: 응, 서울 중심에서 정확히 동쪽 중앙에 위치한 나루란 뜻이지. 이왕이면 청정심(淸淨心)의 표상인 바른 마음가짐으로 새해를 정동진에서 맞는 게 의
가을 아침햇살-천변기행17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아침 산책길의 공기가 산뜻하다. 밤새 내린 비로 냇물은 불어나고, 모래톱에는 청둥오리들이 납작 몸을 낮추어 있다. 동녘 햇살을 향해 고개를 치켜든 가마우지의 모습 또한 눈에 들어온다. 저 생명들은 왜 저런 모양새로 있는 것일까. 걷다 보니 스스로에게 묻는다. 갓 퍼지지 않은 햇살 아래, 제 얼굴을 드러내는 꽃들이 눈길을 붙든다. 아내가 일러준 이름들은 낯설면서도 정겹다. 애기나팔꽃, 둥근잎 유홍초, 도깨비가지, 돌동부…. 봄부터 헤아려본 꽃들이 수십 종이라 이제는 천변 꽃도감을 만들어야 할 듯하다. 어제 능행차 행렬에서 보았던 붉음, 노랑, 파랑, 하양의 깃발빛이 이 꽃빛과 겹쳐 떠오른다. 토종과 귀화종이 어우러져 풀섶에 스며들 듯, 산책길의 운치를 더한다. 문득 울긋불긋 수숫대가 시선을 붙든다. 어린 시절 기억을 소환한다. 또래들과 파란 하늘을 향해 쏘아 올리던 화살, 예쁘게 만들던 수수깡 안경, 돌상에 올랐던 수수떡, 수수빗자루, 수수엿…. 오래전 동화 속 <해와 달이 된 오누이>까지 끌려오니, 참으로 오랜만의 해후다. 저만치 앞서 걷는 이의 뒷모습이 원근감을 만들어내니, 그 또한 가을의 정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