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어 있음은 왜 충만한가-홀릭큐브15
— 공(空)과 진공, 그리고 가능성의 구조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우리는 비어 있음을 두려워한다.
무언가 없다는 것은
곧 결핍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채워야 한다고 믿고,
비어 있는 상태를 견디지 못한다.
그러나 정말
비어 있음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일까?
하나의 점을 떠올려 보자.
점은 작고, 비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직 방향도, 형태도, 의미도 없다.
하지만 바로 그 이유로
점은 모든 방향으로 열려 있다.
비어 있기 때문에
어디로든 이어질 수 있다.
이 단순한 구조는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과 닮아 있다.
비어 있음은
없음이 아니라
정해지지 않음이다.
이 통찰은
중관학에서 말하는 공(空)과 만난다.
공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 아니다.
어떤 것도
고정된 실체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모든 것은 조건에 따라 드러나고
조건이 바뀌면 사라진다.
그래서 공은
비어 있음이 아니라
열려 있음이다.
이제 시선을 바깥으로 돌려 보자.
현대 물리학에서 말하는 ‘진공’은
오랫동안 아무것도 없는 공간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실제로 그 안에서는
끊임없이 미세한 움직임이 일어난다.
입자와 반입자가
순간적으로 생겨났다가 사라지고,
보이지 않는 요동이 계속된다.
비어 있다고 믿었던 자리는
사실 가장 역동적인 자리였다.
이쯤 되면
우리는 질문을 바꿔야 한다.
비어 있음은
정말 결핍인가,
아니면
가능성의 가장 충만한 상태인가?
이 구조를
다시 하나의 흐름으로 바라보자.
점은 비어 있다.
그래서 선이 될 수 있다.
선은 흐른다.
그래서 면이 된다.
면은 펼쳐진다.
그래서 세계가 된다.
이 모든 시작은
비어 있음에서 비롯된다.
유식학의 시선에서도
이 구조는 이어진다.
세계는 식(識)의 작용으로 드러나지만,
그 바탕에는 고정된 실체가 없다.
깊은 층위의
아뢰야식 역시
닫힌 저장고가 아니라
끊임없이 가능성이 열려 있는 장이다.
결국 우리는
하나의 단순한 사실에 다가간다.
비어 있음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아니라
아직 결정되지 않은 상태다.
그래서 비어 있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사라짐이 아니라
열림이다.
우리는 늘 무언가를 채우려 애써왔지만,
정작 새로운 것은
비어 있는 자리에서 시작된다.
이제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비어 있음이란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아니라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상태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