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3.20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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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에서 띄우는 편지 431

빈의자–천변기행 23


빈의자–천변기행 23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천변의 저녁은 마치 보이지 않는 자기장 속에
들어선 듯, 발걸음마저 스스로를 낮추게 한다.

바람은 소리를 덜어내고,
물은 생각을 실어 나른다.
나는 그 고요의 가장자리에서
잠시, 나를 내려놓는다.

들고 나감이 없는 자리,
더할 것도 덜어낼 것도 없는
머무름 하나가
가만히 내 안에 앉는다.

세천이 합류하는 지점,
얼마전까지 하나였던 의자가
오늘은 둘이 되어
서로를 바라보며 놓여 있다.

누가 다녀갔을까.
혹은,
누구를 기다리고 있을까.
나는 그 앞에 서서
문득 오래된 한 시(시인 조병화)를 떠올린다.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이 의자를 비워 드리지요”......의자/조병화

비워둔다는 것,
그것은 단순한 부재가 아니라
누군가를 위한 가장 따뜻한 준비라는 것을
이제야 알 듯하다.

등 뒤로는
모자를 눌러쓴 젊음이 바람처럼 스쳐가고,
앞으로는
봄을 한 걸음씩 들여오는 노인들의 발걸음이
시간의 결을 고르게 다듬는다.

빠름과 느림이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같은 길 위에 나란히 놓일 때,
그곳이 곧 삶의 풍경이 된다.

문득 떠오르는 노랫말 하나,
낡은 기억 속에서 조용히 의자를 끌어온다.

“서 있는 사람은 오시오, 나는 빈의자
당신의 자리가 되어 드리리다
피곤한 사람은 오시오, 나는 빈의자
당신을 편히 쉬게 하리라” ……빈의자/가수 장재남

한때는
높이 오르기 위해
끊임없이 회전하던 의자를 좇았었다.
그러나 지금,
멈춰 있는 이 빈의자 하나가
그 모든 움직임보다 깊은 자리를 내어준다.

어젯밤,
고향선배들이 둘러앉았던 자리.
칠십의 문턱에 들어
웃음과 이야기로 채워지던 시간은
숫자로는 가늠할 수 없는
삶의 결을 드러내고 있었다.

‘인생칠십고래희’라 했던가.

이제는 나이를 넘어서
마음이 가는 곳에 머물 줄 아는 경지,
그 자유로움이야말로
세월이 건네는 가장 깊은 선물일 것이다.

그들이 앉았던 자리에는
칠십 년의 시간이
빈대떡처럼 노릇하게 익어
고소한 향기로 남아 있었다.

천변을 바라본다.
물은 여전히 흐르되
더 이상 서두르지 않는다.

노을이 내려앉은 물결 위에
하루가 스스로를 다독이며 눕는다.

할아버지의 시간,
할머니의 시간,
아비와 어미의 시간이
겹겹이 포개져
하나의 잔잔한 빛으로 번진다.

그리고 그 곁에,
아무도 앉지 않은 의자 하나.

비어 있음으로
더 많은 것을 품고 있는 자리.

그 위로
말없이 시간이 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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