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3.15 (일)

화성에서 띄우는 편지 428

저장된 기억들 – 천변기행 21

 

 

저장된 기억들 – 천변기행 21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폰이 먹통이 되었다.

손에 들고 다니던 작은 기계 하나가 세상과의 연결을 끊어버린 듯하다. 그동안 얼마나 폰에 의지하며 살아왔는지 새삼 깨닫는다. 하루 종일 어둡고 막힌 통 속에 들어앉은 느낌이다.

그런데도 약속한 시간에 사람이 나타났다. 멀리서 찾아온 손님이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오늘 하루는 이미 충분히 의미가 있다.

 

애초의 계획은 인근의 금암 고인돌 유적지와 독산성, 그리고 융·건릉을 함께 둘러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손님의 옷차림이 쌀쌀한 날씨를 견디기에는 다소 가벼워 보였다. 우리는 잠시 망설이다가 일정을 바꾸었다. 마지막에 들르려 했던 카페로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금암 고인돌은 선사시대 사람들이 삶을 이어가던 자리다. 그곳에 서면 수천 년의 시간이 발밑에서 조용히 깨어난다. 그러나 인간의 상상력은 참으로 능소능대하다. 마음속에서는 수천 년의 세월도 한순간 스쳐 지나간다. 휘리릭, 바람처럼.

백제 시대에 축성된 독산성 또한 그러하다. 천오백 년의 세월이 성벽의 돌마다 스며 있지만 우리의 사유 속에서는 그 역시 잠깐의 시간일 뿐이다.

황구지천을 건너면 화산 자락에 자리한 융건릉이 있다. 이백여 년 전 조성된 왕릉의 시간은 조용하고 단정하다.

우리는 그 근처 카페에 앉아 잠시 시간을 내려놓는다.

 

고인돌, 독산성, 융건릉.

세 장소가 하나의 생각을 불러낸다.

 

오늘 마주 앉은 이는 세 사람이다. 발명가와 미용가, 그리고 글을 쓰는 사람.

대화의 흐름은 자연스레 인간 삶의 전범이라 할 진·선·미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것을 현실의 삶 속에서 어떻게 실천하며 살아갈 것인가 하는 이야기로 흘러갔다.

 

하나가 둘을 낳고, 둘이 셋을 이룬다.

그러나 셋의 완성은 또 다른 시작이기도 하다.

어쩌면 이것이 세상의 질서인지도 모른다.

 

우주의 원리를 담아낸 홀릭 큐브를 이야기하는 발명가,

인간의 내면과 외면을 함께 가꾸는 뷰티 플래너,

그리고 마음속 나와의 대화를 글로 옮기는 작가.

서로 다른 길을 걸어왔지만 세 사람 모두 자기 안에 저장된 기억을 세상 밖으로 드러내며 살아가고 있다. 그렇게 서로 다른 삶의 궤적이 하나의 둥근 원을 그리듯 이어진다.

 

겨울 동안 모든 생명이 뿌리를 어둠 속에 묻어 두었다가 봄이 오면 다시 푸른 싹을 틔우듯, 마음 깊은 곳에 웅크리고 있던 생각과 감정의 알갱이들이 어느 순간 세상 밖으로 얼굴을 내민다. 그때 비로소 삶은 저마다의 모양을 이루기 시작한다.

 

점심때가 지나자 카페 안이 갑자기 활기를 띤다. 아주머니들이 무리를 지어 들어와 자리를 잡는다. 한 주 만의 만남일까, 아니면 한 달 만의 재회일까. 서로의 삶을 풀어놓는 작은 토론회가 시작된 듯하다. 얼굴도, 옷차림도, 말투도 제각각이다. 주말 오후 카페는 그렇게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 찬다.

 

문득 십 년 전 풍경이 떠오른다. 그때만 해도 이곳에는 서너 채 건물만 덩그러니 서 있었다. 그러나 어느새 아파트 단지가 사방으로 들어섰고 음식점과 카페들이 빼곡히 자리 잡았다. 이곳도 이제 작은 번화가가 되었다.

 

수천 년 전의 고인돌,

천오백 년 전의 성벽,

이백 년 전의 왕릉,

십 년 전의 마을,

그리고 지금.

서로 다른 시간들이 한 장소 위에서 조용히 겹쳐 흐르고 있다.

 

바다 건너온 이름의 카페에 앉아 이국의 이름표를 단 차를 마신다. 빵을 바라보는 사이 마음속에 켜켜이 쌓여 있던 기억들이 서서히 풀린다.

 

손님들이 떠난 뒤 이용실에 들렀다. 한 달 남짓 자란 머리카락을 자르는 동안 TV 화면에는 호르무즈 해협의 전황이 흘러간다. 세상의 분쟁은 왜 이리도 오래 이어지는지. 이제는 어서 끝나야 할 텐데.

 

집을 나설 때 아내가 잊지 말라고 했던 말이 떠오른다.

고래 싸움에 등 터진 새우젓 한 통,

그리고 인간의 영양을 위해 기꺼이 내어준 닭의 선물, 계란 한 판.

그렇게 또 하루의 기억이 조용히 삶 속에 저장된다.

최근기사

더보기

포토뉴스

더보기

섹션별 BEST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