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에버뉴스 김경순 기자 ]
우리 설날은 내일이래요
시인 · 영화배우 우호태
달력 위에 붉은 숫자들이 길게 이어졌다. 설날을 품은 닷새 연휴다. 토요일부터 시작된 쉼의 시간은 자연스레 발길을 황구지천 둑방길과 가까운 동산으로 이끌었다. 오감이 먼저 다녀온 산책 덕분인지 몸과 마음이 한결 느슨해지고, 겨울 햇살 아래서 비로소 숨 고르는 기분을 얻는다.
설을 앞두고 서둘러 다녀온 성묘와 친척들과의 안부 인사는 시간을 순식간에 접어 넣는다. 사흘이 바람처럼 지나갔다. 세월은 늘 그렇듯 영화 필름 돌아가듯 빠르다. 잠시 멈춰 서서 돌아보면 지나온 길이 겨울 양지처럼 온순하게 다가온다. 바쁘게 살아낸 날들이 모여 만든 따뜻함일 것이다.
경기 남부와 북부 곳곳, 그리고 전국의 지인들에게 새해 인사를 건넨다. 《한반도 소나타》 집필과 《청소년국제폰영화제》를 함께 도와준 이들의 얼굴이 하나씩 떠오른다. 평소 같으면 스쳐 지나갔을 인연들이 명절 앞에서는 또렷해진다. 설악산으로, 지리산으로, 바다로 떠난 가족 여행 소식까지 더해지니 연휴 풍경이 한층 넓어진다.
형님과 함께 찾은 오일장 장터에서는 호떡 하나가 시간을 되돌린다. 꿀이 번지는 달콤함 속에 어린 시절의 명절이 들어 있다. 이번에는 세뱃돈 대신 조카들에게 건넬 로또 복권을 함께 샀다. 당첨 여부와 상관없이(?) 오래 기억될 웃음거리를 마련한 셈이다. 명절의 기쁨은 결국 함께 나눌 이야기에서 비롯된다.
장터 한쪽에는 차례상을 준비하는 손길들이 분주하고, 다른 한쪽에는 타국에서 온 노동자들이 장을 본다. 캄보디아, 베트남, 우즈베키스탄, 미얀마, 중국에서 온 이들이 비닐봉지를 들고 오가는 모습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장터 한복판이 곧 지구촌이다. 우리의 설 풍경 또한 그렇게 조금씩 넓어지고 있다.
아내와 함께한 장보기에서는 현실적인 물가가 먼저 말을 건다. 장바구니를 채우는 일은 곧 생활의 무게를 체감하는 일이다. 수향미와 떡국떡, 나물거리와 과일, 황태포와 고기까지—차례상을 준비하는 품목 하나하나가 새해의 안녕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읽힌다.
집으로 돌아와 신문지를 펴고 나란히 앉아 채소를 다듬는다. 대파와 시금치, 그리고 마늘. 손끝은 분주하고 허리는 묵직하지만 그 수고가 향할 곳을 알기에 기꺼운 노동이 된다. 어린 시절 설빔의 설렘 뒤에 어머니와 할머니의 고단함이 있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또렷이 이해한다. 명절의 기쁨은 늘 누군가의 허리 아픔 위에 놓여 있었다.
범부에게 설날은 가족의 안녕을 비는 날이지만, 지도자에게는 나라의 안녕을 돌아보는 날일 것이다. 백성이 제 뜻을 펼치도록 문자를 만든 임금의 마음을 떠올리며, 오늘의 정치는 과연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 묻게 된다. 배부르고 등 따뜻한 삶, 그 단순한 소망을 이루는 일이 그리 어려운 일일까.
충주호 가까이에 계신 장인어른께 세배를 가는 길에 호숫가에 서서 크게 외쳐볼 생각이다.
야—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