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을바람고개
시인/영화감독
돈키: 오늘은 충청도 영동군과 경북 김천시의 경계, 바로 추풍령에 갈 거야.
호새: 단양, 충주… 그 앞동네들은 건너뛰고 먼 데부터 가시네요?
돈키: 응. 예전 부산역에서 화성까지 걸어오던 길, 이 고개에 닿았을 때였지. 지친 몸을 잠시 쉬려는데 마을 어귀 아주머니가 찐옥수수를 내주셔서 허기를 면했어. 그 따뜻한 마음자락을 아직도 잊지 못해. 이름도 멋지잖아, ‘가을바람고개’. 인생의 고갯마루에 서면, 이런 이름의 바람이 어울리지 않겠니?
호새: 먼 산 바라보며 한숨 내쉴 때, 이미 알아봤시유. 단단히 바람 맞으셨구먼요?
돈키: 인마, 봄바람 불어? 가을 낙엽 휘날리는데 무슨 소리야?
호새: 춤바람이 꼭 봄에만 나남유? 이 계절엔 ‘가을연가’가 어울리지요.
돈키: 이놈, 허파에 바람이 잔뜩 들었구나.
호새: 주인님 눈빛만 봐도 알지요. ‘바람’이란 게 참 묘하대요. 눈에 보이진 않지만 세상을 움직이잖아요. 봄엔 강아지 꼬리처럼 살랑살랑, 여름엔 매미처럼 들끓고, 가을엔 소슬바람으로 마음을 흔들고, 겨울엔 눈꽃송이 퀵서비스 보내듯 싸늘하니…. 도무지 알다가도 모를 놈이에요.
돈키: 인간의 삶은 지수화풍(地水火風)과 더불어 노니는 거야. 땅과 물, 불처럼 바람도 여러 얼굴이 있지. 하늬바람, 마파람, 샛바람, 치맛바람…. 춤바람, 신바람, 투기바람까지 — 불기 시작하면 세상이 흔들려. ‘타짜’들은 장풍으로 판을 쓸고, 적벽대전은 쌍풍이 강을 뒤집었잖냐.
호새: 풍(風) 맞으면 입 돌아간다 던데, 그게 그런 거유?
돈키: 그건 몸이 아니라 마음이 삐뚤어져서 그래. 낙엽을 떨구듯 추풍(秋風)으로 쓸어내야지. 정풍(整風), 바로잡는 바람이 불어야 해. 그래야 세상도 새로워지지.
호새: 그래도 ‘가을바람고개’란 이름 참 좋아요. 바람이 지나가다 쉬어가는 곳 같아요.
돈키: 가수들도 바람을 노래하잖아. ‘바람아 멈추어다오’, ‘꽃바람 여인’, ‘바람 속으로’…. 노래마다 바람이 살아 있지.
호새: 그 노래 따라 불빛 아래 춤바람이 일면, 세상 시름도 잠시 잊지요.
돈키: 그게 삶의 ‘웰빙’이야. 요렇게, 요렇게— 스텝 밟으며 살아보는 거지.
호새: 주인님, 그럼 ‘오빤 추풍령 스타일’로 한 판 출까요? 주인님은 탭댄스, 저는 말춤!
돈키: ‘라라랜드’처럼 말이지? 나비넥타이 매고, 별빛 아래서?
호새: 양반은 양반답게 삿갓 쓰고 곰방대 물며 흔들어보시라요. 세상사 내 맘대로 안 되니, 춤이라도 내 맘대로 춰야지요.
돈키: 하하, 그래. 이 고개에 와보니 실감이 난다. “바람도 구름도 쉬어가고, 기적도 목메어 울고 가는 추풍령.”
호새: 인생의 보릿고개를 넘기던 그 시절이 떠오르네요. ‘영신식당”의 펀치여사님, 그분의 진풍경(眞風景), 인심(善), 과일맛(味) — 그게 추풍령의 ‘진선미’ 아니겠어요?
돈키: 맞아. 여기의 기적소리는 의로운 사람의 목소리요, 깨어 있는 영혼의 노래지.
호새: 산마루의 秋風靈, 그 소리가 “한반도여, 곧추서라!” 외치는 듯하네요.
돈키: 그래, 백두대간의 가을바람고개 — 秋風嶺!
우수수 낙엽비 타고 닻 내렸으니, 이제 돛을 올려 다시 가자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