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에버뉴스 김경순 기자 ] 서울(한성·경성) 출신 독립유공자 230명이 새롭게 발굴됐다. 이번 발굴은 서울시 광복 8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추진된 것으로, 서울시는 새롭게 발굴된 독립유공자들에 대해 27일, 국가보훈부에 포상신청서를 제출했다.
이번 발굴 연구를 담당한 인천대학교 독립운동사연구소는 5월부터 6인으로 구성된 연구팀을 꾸려 일제 침략기 및 강점기에 생성된 주요 문서를 해석하며 서울출신 독립운동가를 찾는 작업을 했다.
서울출신 독립운동가의 범위는 국가보훈부의 포상규정 연도 기준에 따라 1895년부터 1945년까지의 독립운동을 한 유공자이고, 행정구역 기준은 한성부(1895~1910)·경성부(1910~1946), 그리고 서울특별시(1946~1951) 출신으로 설정했다.
연구소에서는 판결문, 형사사건부, 집행원부, 수형인면부,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 등 약 7만 건의 사료 중 8천 건의 서울출신 독립운동가 사료와 특히 기존에 연구하지 않았던 일본외무성기록과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문서 등을 연구하여, 약 230명의 서울출신 독립운동가를 발굴해내는 성과를 내었다.
이외에도 지금까지는 독립운동 활동에도 불구하고 이념이나 무죄, 면소 판결의 경우 포상에서 제외됐으나, 최근 이런 제약이 약해짐에 따라 보다 많은 독립유공자를 발굴할 수 있었다.
이번 연구를 통해 발굴된 독립유공자에는 경성부 창신동 출신으로 평북 정주 오산학교 교사였던 박현환(朴賢煥) 지사와 비밀 결사 조직 동우회를 조직하고 매국노 이완용의 집에 방화를 한 김경석, 최병선 지사 등이 있다.
박현환 지사는 1919년 2월 오산학교 설립자 이승훈 (李昇薰, 본명 寅煥)에게 서울에서 종교 지도자들의 비밀모임이 있음을 전해주었고, 1919년 6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료편찬위원과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의 기자로 활약했으며, 안창호(安昌浩)의 흥사단 자매단체로 수양동우회를 설립하여 활약하다 붙잡혀 4년여 옥고를 겪었다.
김경석 지사 및 최병선 지사는 이완용 등 매국 내각이 일제의 앞잡이가 되어 광무황제의 양위를 강요하고 일본과의 불합리한 조약 체결을 서두르는 것을 알고 윤이병(尹履炳), 이근우(李根雨) 등과 함께 1907년 6월 비밀결사인 ‘동우회(同友會)’를 조직했다. 실천 방안으로 광무황제 양위 반대 및 매국노 이완용의 집에 방화 등을 한 혐의로 붙잡혀 두 지사 모두 1907년 12월 29일 평리원에서 내란죄로 유형(流刑) 10년이 선고되어 고초를 겪었다.
김규항 지사는 1907년 9월 10일경 의병장 이강년 휘하에 들어가 동 부대의 서류, 인감 등을 보관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 문경 동학군의 지휘관으로 일본군 탐관오리와 싸웠으며, 일제가 1895년 명성황후 참살사건(을미사변)을 일으키자 의병을 일으켜 제천에서 류인석의 의병과 합류하여 유격장(遊擊將)이 됐다. 이후 이강년과 함께 맹활약을 하다 붙잡혀 1919년 2월 16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내란죄로 유형(流刑) 5년이 선고되어 고초를 겪었다.
김영필 지사는 1919년 3월 22일 아침 9시 반경 7~8백 명의 군중이 서울 봉래동(蓬來洞)에서 ‘노동자대회’를 개최하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아현고개까지 행진했다. 이튿날인 23일 저녁부터 심야까지 시내 여러 곳에서 독립만세시위가 일어났는데, 그날 김영필은 숭인동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다가 붙잡혀 종로경찰서에서 심문을 받은 후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어 5월 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이 선고되어 경성감옥에서 고초를 겪었다.
박봉연 지사는 박경호(朴慶浩) 등과 서울인쇄직공청년회와 북악청년회(北岳靑年會) 등을 조직하고, 서울청년회, 경기도청년연합회, 인쇄직공조합 등과 연합하여 반제국주의 청년운동에 투신했다. 이 일로 붙잡혀 1930년 6월 1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이 선고됐다.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중, 대전형무소로 이감하게 됐는데 이병직(李秉稷), 정헌태(鄭憲台) 등과 함께 이감 도중 ‘조선민족독립만세’등을 외치다 1932년 1월 25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이 추가 선고되어 고초를 겪었다.
이동재 지사는 1931년 일제의 흉계로 일어난 '만보산사건'의 진상을 밝히고자 같은 해 7월 7일 '전조선 혁명적 학생에게 격(檄)함'이라는 제목으로 ‘일제는 재(在) 만주 조선인의 옹호라는 핑계로 농민의 피로써 만몽(滿蒙)의 권리를 강탈했다. 전 조선의 혁명적 학생 제군들이여, 전투적 동맹휴교와 대중의 데모로 강도 일본제국주의와 싸워 나가자’는 내용의 격문 2,000매를 인쇄, 배포하고 동맹휴교를 선동했다는 혐의로 붙잡혀 1932년 7월 1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이 선고되어 고초를 겪었다.
김용남 지사는 1941년 경성사립보성전문학교 법과에 재학 중, 일본대학 유학생인 김영창(金永倉) 및 김규엽(金圭燁), 오유환(吳有煥) 등과 함께 시와 문학으로 한민족의 문화, 역사, 교양을 통해 민족의식을 함양시키고자 조선문단에 적극 참여했다. 김용남은 대중을 계몽하고 조선독립의 기틀을 마련하겠다는 의지로 적극적인 활동을 하다가 붙잡혀 1943년 4월 23일 치안유지법위반 죄로 징역 1년(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아 고초를 겪었다.
한편, 시는 27일 오후 2시 서울시청에서 ‘서울 출신 독립유공자 포상신청 설명회’를 개최하고, 국가보훈부 장관을 대신하여 행사에 참석한 전종호 서울지방보훈청장에게 공적자료가 첨부된 서울특별시장 명의의 포상 신청서를 전달했다.
설명회에서는 이외에도 서울시와 광복회 관계자 등이 참석했으며 이태룡 인천대학교 독립운동사연구소장의 포상신청에 대한 안내가 있었다.
국가보훈부는 포상신청서를 검토한 뒤, 최종적으로 독립유공자 포상여부를 확정하게 된다.
윤종장 서울시 복지실장은 “광복 80주년을 맞아, 독립운동에 기여했으나 제대로 된 예우를 받지 못하던 서울 출신 독립유공자 발굴사업을 추진하게 됐다”라면서 “내년까지 발굴사업을 지속해 총 500명의 독립유공자를 찾아내는 것이 목표다”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