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를 찾아서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주섬주섬 옷가지를 챙겨 오랫만에 충주행이다. 아내와 함께 구순을 넘어선 장인을 찾아뵙는 날이다.
유튜브에 강연이 살가운 분위기로 진행중이다. <나는 누구인가?>, 십여년전 글제와 어울려 삼복더위에 온밤을 지새우며 국토를 순행한 날들이 있었기에 귀가 열렸다. 걷는 동안 사방의 적막속에 찾아든 내면의 적요, 그때 찾은 ‘나’가 있었기에 강연의 주제가 흥미롭다.
어린시절엔 잃어버린 ‘구슬’을 찾으려 장롱밑을 싸리가지로 꽤나 휘저었고, 강건너 ‘구슬’을 찾아온 <고양이와 개>의 동화에 푹 빠진 ‘나’가 있겠다. 그런 여린 필자와 달리 마르코는 <엄마찾아 삼만리>요, 30-40대였을 마르셀은 푸르스트는 ‘나’를 찾아 16년여간 집필했다니 ‘나’란 놈이 대체 무엇인가?
‘나’를 찾아 발자취 남긴 분들이 한둘이랴! 주지하는 바처럼 혜초, 바울, 석가, 공자, ... 등은 진리탐구 여정에서 ‘나’를 찾은 현자들이요 실천가들이다.
이순신, 양규, ….등 무수한 영웅들은 전쟁터에서, 안중근, 윤봉길, ..등 우국지사들은 나라가 처한 위중한 현실에서 ‘나’를 찾았다 싶다.
어디 이뿐이랴! 세종, 슈바이처, 테레사, 아인슈타인, 다윈… 저명한 분들은 물론이요 평생 모은 바느질 삯을 기부하는 할머니까지 수 많은 분들이 이승의 제모습인 ‘나’를 찾아 제길을 걸은게다. 어느 철인은 “너 자신을 알라”며 ‘나’를 찾았을테요, 어느 신앙인은 고백성사로, 어느 실업자는 긴 한숨속에 ‘나’를 찾거나 찾고 있을게다.
‘나는 누구인가?’ 우주란 시.공간에 제자리에 제때 제모습을 피우는 유일무이의 말하고 사유하는 신비스런 생명체의 본연인가도 싶다. 삶의 여정에 차오르는 환한 감정이 행복일지니 글제에 대한 자문(自問)은 생명체 본연에 닿는 물음이요 내면의 적요속에 맞을 기쁨이겠다. 세상에 ‘나’만 있으랴? ‘너’는 누구인가? 엇비슷한 노래말처럼 내가 ‘나’를 모르는데 내가 ‘너’를 어찌 알고 네가 ‘나’를 어찌 알랴! 점 하나에 우주가 들었단다. 순간이 영원이요 너와 내가 둘이 아니건만 세상은 요지경이다.
“여보, “저기, 좀 봐봐” 반만년은 버텼을 산허리를 두른 바윗돌이다. “여기, 어디야?” 스쳐지나는 산천이 의구하다. 산자락 모퉁이 양지녘 기운이 차내에 들어 오후 나절의 참 따스한 단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