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꽃 ㅡ천변기행41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온종일 화성 동서남북 문화기행 상영 장소를 살피고 영화제 행사 준비를 위해 동서를 오간 끝에 무거운 발걸음을 저녁 둑방길에 내려놓는다. 낮의 열기를 식혀 주는 시원한 바람이 하루의 피로를 어루만진다. 벤치에 가만히 앉아 있으니 개미들이 줄지어 오간다.
눈여겨보니 블록 틈새 작은 구멍으로 쉼 없이 드나든다. 제 몸집 길이에 비하면 수십 배는 될 사각 블록을 눈 깜짝할 사이에 건너는 모습이 경이롭다. 둑방길을 천천히 달리는 사람들과는 또 다른 시간의 속도다.
저 개미가 수개미 327호인지 암개미 56호인지 알 길은 없다. 문득 베르나르 베르베르의『개미』가 떠오른다. 잠시 그 상상의 세계에 동승해 본다.
산책길 초입에는 분꽃이 피었다.
해가 지면 꽃잎을 열어 은은한 향기를 내뿜고, 아침이면 스스로 꽃을 거두는 분꽃(Mirabilis jalapa). 서양에서는 '밤의 미인(Marvel of Peru)'이라 불리는 꽃이다. 달빛 아래 더욱 빛나는 그 아름다움 때문이리라.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녀석을 만나러 다시 이 길을 걸어야겠다.
황금빛 술잔을 닮은 금잔화도 저녁 바람에 몸을 맡긴다. 금계국의 계절을 이어받으려는 듯 길게 이어진 화단에서 연신 몸을 흔든다.
맞은편 밭둑에는 통통하게 알이 차오를 옥수수들이 줄지어 서 있다. 꽃술이 싱그러우니 머지않아 어린 시절 입에 물던 하모니카 소리가 들려올 듯하다.
좌우로 고개를 돌릴 때마다 풀꽃 하나, 바람 한 줄기, 하루살이들이 지난 세월을 불러낸다. 오늘도 천변 산책길은 말없이 삶을 가르치고, 계절은 소리 없이 흘러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