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恨)과 흥(興), 그리고 고요한 전쟁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우리네 가슴에는 오래전부터 두 개의 강이 흐른다.
하나는 한(恨)이고, 다른 하나는 흥(興)이다.
한은 억울함과 슬픔이 켜켜이 쌓여 맺힌 마음이다. 실향의 아픔도, 분단의 상처도, 이루지 못한 꿈도 한이 된다. 그래서 피리소리 한 자락에도 가슴속 응어리는 물길을 이루어 흐르고, 긴 한숨 하나가 하늘 끝까지 닿는다.
반면 흥은 삶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힘이다. 꽹과리와 장구가 울리고 막걸리 잔이 오가면 어깨춤이 절로 난다. 민요 한 가락에도 마음은 들썩인다. 한이 삶의 깊이라면 흥은 삶의 높이다. 우리 민족은 한으로 무너지지 않았고, 흥으로 다시 일어섰다.
오늘은 유난히 심지를 태워 제 길을 밝혀야 할 날인 듯하다.
세상을 바라보니 한마당 광대놀이판이다. 누군가는 한숨을 쉬고, 누군가는 노래를 부른다. 긴 한숨과 흥겨운 콧노래가 뒤섞여 세상은 제멋대로 굴러간다.
그런데 문득 이상한 정적이 흐른다.
나팔수조차 잠든 듯한 침묵.
고요한 전쟁이다.
총성이 없다. 포연도 없다. 군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생각을 품고 길을 나선다. 손에 든 것은 총이 아니라 한 장의 투표용지다.
누군가는 희망을 담고, 누군가는 분노를 담고, 누군가는 더 나은 내일을 꿈꾸며 한 표를 행사한다.
민주주의는 어쩌면 가장 조용하면서도 가장 치열한 전쟁인지 모른다. 함성이 없어도 뜻이 부딪히고, 무기가 없어도 미래가 갈린다.
그래서 투표일의 침묵은 단순한 고요가 아니다. 나라의 방향과 공동체의 운명을 결정하는 국민의 숙고와 선택이 흐르는 시간이다.
눈 뜨고도 코 베이는 세상이라 했는데, 이제는 스스로 눈을 감은 채 살아가는 시대가 된 듯하다. 넘쳐나는 정보 속에서 생각하기보다 따라가고, 판단하기보다 기대려 한다. 오감이 멀쩡한 생명체이면서도 어느새 눈 뜬 로봇이 되어가는 것은 아닐까.
그때 불현듯 들려오는 목소리.
유격장 조교의 외침이다.
"후보생, 눈을 떠요!"
그 한마디는 비단 훈련장의 구령이 아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보내는 경고이자 당부다.
눈을 뜨라.
귀를 열라.
그리고 스스로 판단하라.
한많은 역사를 지나온 이 땅에서 흥타령만 부를 수도 없고, 한숨만 내쉴 수도 없다. 한은 현실을 직시하게 하고, 흥은 미래를 향해 걷게 한다.
고요한 전쟁은 하루면 끝나지만 그 결과는 다시 우리의 삶으로 돌아온다. 한 표의 무게는 가볍지만, 그 한 표가 모여 시대의 방향을 바꾼다.
허리 잘린 한많은 땅에도 봄은 오고, 흥겨운 노랫가락은 이어진다.
한과 흥 사이에서 우리는 또 하나의 선택을 한다.
아아아,
한숨은 역사가 되고, 흥타령은 희망이 된다.
오늘의 고요한 전쟁에서 진정한 승자는 특정한 누군가가 아니다.
깨어 있는 시민이다.
눈을 크게 뜨고 시대를 바라보는 사람, 자신의 양심으로 선택하는 사람, 그리고 그 결과를 함께 책임질 줄 아는 사람이다.
그들이야말로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힘이며, 이 땅의 진정한 주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