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봐야 맛을 알지
시인/영화감독 우호태
신방구리
이제 추풍령을 내려와 황간을 거쳐, 저편에 영동역이 다다르네요.
돈키
그때가 떠오르네. 얼마나 피곤했던지 다리 밑에 박스를 깔고 잠시 눈을 붙였지. 눈에 길이 들어오기 시작하니 거의 다 왔다는 안도감이 들더군. 옥천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대전과 신탄진을 거쳐 천안에 이르니 어느새 일행이 열 명 남짓으로 늘어났어. 군대 행군이나 소백산·설악산 산행을 빼면, 그렇게 여럿이 밤길을 걷는 건 참 이채로운 경험이었지.
신방구리
사고 나거나 다친 분은 없었어요?
돈키
심신을 다잡고 참여한 터라 큰 탈은 없었지. 다만 초행길이면 신발이나 발목, 무릎에 무리가 오기 마련이야. 신탄진에서 한 분이 발목이 불편해 열차로 천안까지 이동했어. 나는 혼자 남게 되었지. 시간을 맞추려 신탄진에서 천안까지 70여 킬로를 내달렸으니, 말하자면 역전마라톤을 한 셈이야.
신방구리
천안과 오산에서 더 많은 분들이 합류했다면서요?
돈키
그래. 어떤 분은 말하더군. 일상에 지친 몸과 마음을 풀고 싶은데, 혼자서는 선뜻 나설 수 없어 함께 왔다고. 누구나 한 번쯤은 자신을 혹독하게 담금질할 시간이 필요해. 기억이 또렷하진 않지만, 길에서 서너 명씩 걷는 이들을 종종 만났어. 남녀를 가릴 건 아니지만, 특히 여성분들이 대단하더군. 힘들어 열이 늘어질 때도 있었지만, 그분들 덕에 천 리 여정의 마무리 구간이 오히려 즐거워졌지.
신방구리
걷는 게 취미인가요? 장거리를 자주 걸으시네요.
돈키
취미라기보단 습관일지도 몰라. 걸어봐야 그 맛을 알지. 말로 설명해서 다 전해지지 않아.
신방구리
평택과 오산에 이르렀을 때는 어떤 마음이 들었어요?
돈키
부산에서 시작해 구포, 김해, 삼랑진, 밀양, 청도, 경산, 대구, 칠곡, 구미, 김천, 추풍령, 영동, 옥천, 대전, 신탄진, 조치원, 천안, 성환, 평택, 오산… 그리고 병점 구봉공원에 닿았을 때였지.
그 순간, 귀거래사의 한 구절이 문득 떠올랐어.
“내첨형우 재흔재분(乃瞻衡宇 載欣載奔).”
집이 보이자 기쁨에 겨워 달려간다는 그 말이 그대로 실감나더군. 집 근처에 왔다는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어. 사무실 동료들이 반겨주네. 극에 달했던 피로가 한순간에 가시고 기분이 참 좋았지.
